낙엽 하나 떨어지는 걸 보고 있었다

창밖에서 낙엽 하나가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붉게 물들었던 그 잎이 땅에 닿는 걸 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저것도 봄엔 연두색 새싹이었을 텐데.
봄날의 나는 참 순진했다
생각해보면 나도 여러 번의 봄을 맞았다. 대학 입학할 때, 첫 직장에 들어갈 때,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그때마다 "이번엔 다를 거야"라고 생각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누군가 해준 말을 되뇌며 떨리는 마음으로 시작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설렘이 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참 용감했다. 아니, 무모했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그땐 선명하고 싱그러운 초록빛 꿈이라는 게 있었다.
여름은 생각보다 길고 뜨거웠다
문제는 여름이었다. 시작은 늘 괜찮았는데, 막상 한여름으로 들어가면 생각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타들어갈 것 같았다.
윤동주 시인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다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부끄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밤샘 작업하면서도 진도는 안 나가고,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어디선가 타협하고, 꿈을 향해 달린다고 했지만 중간에 몇 번이나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그래도 여름은 지나갔다. 어떻게든 지나가더라. 단단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더 둔감해지긴 했다.
가을이 왔을 때 깨달은 것
그리고 가을이 왔다.
결실이라고 할 만한 게 있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뭐랄까, 기대했던 황금빛 들판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적당히 익은 것들, 반쯤 시든 것들, 아예 열매를 맺지 못한 것들이 뒤섞여 있을 뿐이었다.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 건 떠날 준비를 하는 거라고 누군가 말했다. 엽록소를 나무에 돌려주고 본래의 색을 드러낸다고. 그 말을 듣고 나니, 내가 붉게 물들어 있는 건지 그냥 늙어가는 건지 헷갈렸다.
돌아보니 내가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명쾌하게 답할 수가 없었다. 뭔가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온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고 달려온 것 같기도 했다.
낙엽처럼 떨어지는 것들
그러다 낙엽들이 떨어지기 계절인 온다.
법정 스님은 "내려놓음은 비움이 아니라 채움"이라고 했다던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냥 떨어지는 것 같다. 내려놓는다는 거창한 표현보다는, 그냥 손에서 놓쳐버린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이루지 못한 것들, 떠나간 사람들, 지나간 시간들... 붙잡고 싶었지만 결국 놓쳐버렸다.
포기가 아니라 다음 계절을 위한 준비라고 말하면 좀 멋있게 들리겠지만, 그냥 지쳐서 놓은 것도 있고, 놓칠 수밖에 없어서 놓은 것도 있다.
그래도 나무는 낙엽을 떨어뜨리고 겨울을 견딘다더라. 그렇게 떨어진 낙엽이 다시 영양분이 되어 봄날의 새 싹을 키운다더라.
내가 놓쳐버린 것들도 언젠가 그런 의미가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 어느 계절쯤일까
창밖의 낙엽들이 바람에 흩날린다.
나는 지금 인생의 몇 월쯤 살고 있는 걸까. 봄은 이미 지나간 것 같고, 여름도 한참 지난 것 같다. 가을 끝자락에 와 있는 건지, 아니면 벌써 겨울로 접어든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계절이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계절은 어차피 돌고 도는 거니까. 봄이 와서 시작하고, 여름에 버티고, 가을에 돌아보고, 겨울에 쉬었다가 다시 봄이 오는 것. 그게 자연의 리듬이라고, 우리 인생도 그렇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리듬을 잘 타지 못하는 것 같다.
봄인데도 움츠러들어 있을 때가 있고, 겨울인데도 쓸데없이 발버둥칠 때가 있다.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 저항하다가, 어느새 다음 계절이 와 있다.
그래도
낙엽은 떨어지면서도 춤을 춘다는 말이 있다.
오늘도 창밖에서 낙엽 한 장이 빙글빙글 돌며 떨어진다. 춤이라고 하기엔 좀 쓸쓸해 보이지만, 그래도 나름 우아하긴 하다.
나도 저렇게 떨어질 수 있을까. 아니, 떨어지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할 것 같다. 중간에 어딘가 걸려서 촐랑대거나, 아니면 그냥 퍽 하고 떨어질 것 같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겨울이 지나면 봄은 또 온다. 낙엽 아래에선 벌써 다음 봄의 새싹이 준비되고 있다. 우린 경험으로 그것을 믿고 있다.
창밖의 나무를 본다. 저 나무도 매년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위로가 된다.
나만 서툰 게 아니구나.
오늘은 유난히 바람이 차다. 낙엽들이 마지막으로 나무에 매달려 있다. 나도 뭔가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뭔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