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무너지면 제일 먼저 도덕 관념이 깨진다

공황의 심연에서 발견한 인간의 조건
올 봄과 여름사이, 나는 처음으로 공황발작을 경험했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숨을 쉴 수 없었으며,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하지만 더 무서웠던 것은 그 이후였다. 공황이 지나간 자리에는 예상치 못한 폐허가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나의 도덕적 토대였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어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약속을 어기고, 거짓말을 했으며,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평생 지켜왔던 원칙들이 하룻밤 사이에 증발해버렸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나 자신이 이런 변화에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법도, 규칙도, 타인에 대한 배려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남는 것, 아니 그저 다음 순간을 버티는 것만이 유일한 과제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나쁜 사람이 된 것일까?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일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질문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삶 자체가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의미가 없으니 지킬 것도 없었고, 중요한 것도 없었다. 도덕적 기준점이 제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생존의 뇌, 윤리의 부재
시간이 지나 조금은 안정은 찾은 지금 그때의 나의 혼란이 궁금해졌는데 공부를 하몀 이해가 좀 됐다.
신경과학은 내가 경험한 이 기묘한 변화를 설명해준다. 공황장애와 같은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에서 우리 뇌는 '생존 모드'로 전환된다. 편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되고, 전전두엽 피질—이성적 판단과 도덕적 추론을 담당하는 영역—의 기능이 억제된다. 신경과학자 조지프 르두(Joseph LeDoux)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진화적으로 합리적인 반응이다. 맹수에게 쫓기는 순간에 도덕적 딜레마를 고민할 여유는 없다. 생존이 먼저고, 윤리는 나중이다.
문제는 현대의 공황이 신체적 위협이 아닌 심리적 위협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실제 맹수는 없지만, 뇌는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신경학적 기반을 잃어버린 채,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뇌의 구조적 문제다.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아우슈비츠에서 비슷한 현상을 목격했다. 수용소의 일부 수감자들은 극한의 상황에서 도덕성을 유지했지만, 많은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프랭클은 이것이 개인의 성품 문제가 아니라, "의미의 상실"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삶의 의미를 잃으면, 도덕적 행동을 지탱할 내적 동기가 사라진다. 도덕은 풍요의 산물이 아니라, 의미의 산물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옳았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이 유명한 문장은 종교적 명제가 아니다. 이것은 심리학적 관찰이다. 여기서 '신'은 종교적 실체가 아니라, 우리 삶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초월적 준거점'을 의미한다.
정신이 무너진다는 것은 바로 이 준거점을 잃는 경험이다. 나에게 그것은 공황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우울증이며, 또 다른 이에게는 상실이나 트라우마다. 준거점이 사라지면 모든 가치 체계가 부유한다.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의 구분이 흐려진다. 도덕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 선택이 되고, 결국 무의미한 것이 된다.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이를 '부조리'라고 불렀다. 세상은 의미를 요구하지만 의미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카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부조리를 인정하는 것이 허무주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 자유를 감당할 심리적 여력이 있느냐는 것이다. 정신이 무너진 사람에게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도덕은 사치가 아니라 증상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도덕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점이다. 도덕은 '해야 할 것'의 목록이 아니다. 도덕은 건강한 정신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다. 마치 건강한 신체가 자연스럽게 걷고 뛰듯이, 건강한 정신은 자연스럽게 타인을 배려하고 규칙을 지킨다.
심리학자 매슬로우(Abraham Maslow)의 욕구 위계 이론은 이를 잘 보여준다. 생존과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우리는 소속감이나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없다. 도덕은 고차원적 욕구에 속한다. 정신적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도덕적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익사 직전의 사람에게 아름답게 헤엄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공황장애를 겪으며 나는 매 순간 익사하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 다음 순간을 견디는 것, 그것만이 전부였다. 신호등을 지키는 것, 예의를 갖추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들 이 모든 것은 '여유'를 필요로 한다. 심리적 여유. 정신적 여유. 그리고 나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아픈 사람이었다.
회복의 의미
공황은 천천히 가라앉았고, 나는 조금씩 나 자신을 되찾아갔다. 흥미로운 것은 도덕성이 돌아온 과정이었다.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정신이 회복되면서, 도덕성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물론 아무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매순간 정신을 찾으려 노력했고 도덕성은 마치 봄이 오면 꽃이 피듯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를 위해 문을 잡아주고 싶다는 호의.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는 마음. 거짓말을 하면 불편한 감정. 이것들은 도덕 교과서에서 배운 의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건강해지는 정신의 신호였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곧 기도"라고 말했다. 타인에게, 세상에게, 삶의 디테일에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정신 건강의 지표다. 공황 속에서 나는 아무것에도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다. 오직 내 안의 공포에만 몰두했다. 회복은 다시 세상으로 주의를 돌릴 수 있게 되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놓치는 것
현대 사회는 도덕적 실패를 개인의 성품 문제로 치부한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규칙을 어기거나,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우리는 '나쁜 사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내 경험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많은 경우, 도덕적 붕괴는 정신적 붕괴의 증상이다.
이것은 모든 잘못을 정신 건강 문제로 환원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의 책임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도덕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길러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토양은 정신 건강이다.
정신과 의사 베셀 반 데어 콕(Bessel van der Kolk)은 "트라우마는 말로 표현되지 않으면 몸으로 표현된다"고 말했다. 나는 여기에 덧붙이고 싶다. 정신적 고통은 말로 표현되지 않으면 행동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행동은 종종 도덕적 일탈의 형태를 띤다.
나를 지키는 것이 세상을 지키는 것
공황을 겪으며 나는 역설을 배웠다. 도덕적이 되려면, 먼저 나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것. 타인을 배려하려면, 먼저 내 마음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 세상을 지키려면, 먼저 나를 지켜야 한다는 것.
이것은 이기심이 아니다. 이것은 생태학이다. 나라는 생태계가 건강해야, 관계라는 생태계가 건강해질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네 내면의 요새를 지켜라"고 했다. 그 요새가 무너지면, 우리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착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고, 책임감 있어야 하고, 배려해야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의 정신 건강은 돌보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뿌리를 돌보지 않고 꽃만 피우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무너짐 속에서 발견한 인간다움
역설적이게도, 내가 가장 도덕적이지 못했던 순간에 나는 인간에 대해 가장 많이 배웠다. 인간은 완벽한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취약하고, 불완전하며,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다움이다.
니체는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본다"고 말했다. 나는 공황이라는 심연을 들여다보았고, 그 심연은 나에게 묻었다. "네가 믿는 도덕은 진짜냐, 아니면 그저 편안할 때만 유지되는 가면이냐?" 그리고 나는 솔직하게 답해야 했다. "가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이 절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짜 도덕, 시험받은 도덕, 취약함을 알고도 선택하는 도덕. 그것을 향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프랑스 저항운동가였던 알베르 카뮈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겨울 한가운데서 나는 마침내 내 안에 불굴의 여름이 있음을 발견했다." 라고 썼다.
나는 공황의 한가운데서 도덕은 규칙이 아니라 회복이고, 의무가 아니라 치유이며, 강요가 아니라 성장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정신이 무너지면 제일 먼저 도덕 관념이 깨진다. 맞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묻는다. 진정한 도덕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진정한 도덕은 정신이 온전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를 돌보는 것, 내 마음을 지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도덕적인 행위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친절할 때, 비로소 타인에게도 친절할 수 있다. 이것은 약함이 아니라, 지혜다."
2025년 11월 9일 일요일
집에서, ssodan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