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노년이란 무엇인가 - 늙음을 혐오하는 사회에 맞서다

- 제목: 노년이란 무엇인가
- 부제: 늙음을 혐오하는 사회에 맞서다 | 박홍규의 사상사 2
- 저자: 박홍규
- 출판: 들녘
- 출간: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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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이란 무엇인가 | 박홍규의 사상사 2 | 박홍규
‘박홍규의 사상사’ 시리즈 두 번째 책이 출간되었다. “우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전작의 도발적인 질문에 이어 이번에는 ‘노년’이 사상과 문화, 예술, 정치, 사회 등의 영역에서 어떻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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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이란 무엇인가 — 아직 늙지 않은 자의 두려움에 대하여
40대 후반. 아직 늙지 않았지만 늙음이 가까워지는 나이.
거울을 볼 때마다 늘어나는 흰머리, 예전 같지 않은 체력,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이제 나이가 나이니까"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나이.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왜 노년이 두려운 걸까? 왜 '늙음'이라는 말 자체를 피하고 '나이 듦' 같은 온화한 단어로 바꿔 부르고 싶어 하는 걸까?
박홍규의 『노년이란 무엇인가』를 집어 들었을 때, 나는 아직 노년이 아니지만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노년을 알아야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 책은 노년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건 나의 이야기였다.
늙음을 수치처럼 여기는 우리
"늙음을 수치스러운 비밀처럼 여기고, 그런 걸 입에 담는 자체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만연했다고 저자는 쓴다.
맞다. 우리는 '노인'이라는 말조차 꺼리고, '시니어'나 '어르신' 같은 완곡어법을 쓴다. 노화 방지 화장품, 안티에이징, 젊어 보이는 법. 거리엔 늙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넘쳐난다.
그런데 왜? 왜 우리는 노년을 이토록 두려워하는가?
박홍규는 묻는다. 노년이란 단순히 '늙음'과 '늙은 이후의 시기'를 뜻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노년에 대해 가진 편견과 공포, 그리고 사회가 노인을 대하는 방식 전체를 뜻하는가?
이 책은 총 1부와 2부로 나뉘어 근대 이전과 이후의 노년 사상을 살핀다. 그리고 첫 문장부터 우리의 편견을 산산이 부순다.
"노인이 존경받았던 시대란 허상이다."
특권층 노인만 존경받았던 시대
오늘날 만연한 사회 문제에 대해 혹자는 '건강한 유교 질서의 붕괴'를 원인으로 들며 노인과 그들의 지혜가 존중받았던 시대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박홍규는 그런 시대는 없었다고 단호히 말한다.
존중받는, 혹은 존중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노인은 극소수였다. 생활환경이 열악했던 시대에 노년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다. 대부분은 극심한 빈곤 속에서 죽을 때까지 노동해야 했으며, 그런 그들의 모습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특권계급 노인들은 당시 사회를 이끌었으나, 부와 사회적 지위를 두고 젊은 세대와 끊임없이 갈등 관계에 놓였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거다. 늙고 가난한 노인은 언제나 버려졌다. 존경받은 건 늙은 권력자들뿐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섬뜩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는 재벌 회장이 팔십이 넘도록 경영 일선에 있으면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칠십이 넘도록 택배를 날라야 하는 노인에겐 "안타깝다"고만 말한다.
똑같이 늙었는데, 부와 지위에 따라 존경과 동정이 갈린다. 이게 우리가 말하는 노년 존중의 실체다.
키케로의 거짓말 — 원로원을 위한 노년론
오늘날 가장 유명한 노년론으로 일컬어지는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그 책은 노년에 대한 고대 저술로서는 유일하게 우리말로도 여러 번 번역되었다.
키케로는 말한다. 노년이 되어도 정치 활동과 정신 활동을 할 수 있고 농사일도 할 수 있다. 체력 저하는 절제 있는 생활로 늦출 수 있으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 감퇴는 오히려 노년의 큰 축복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노인뿐 아니라 모든 시기에 다 느낄 수 있다고.
듣기에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박홍규는 이렇게 쓴다.
"『노년에 관하여』는 특권계급인 원로원 노인들을 위한 책이었다."
키케로가 이 책을 쓴 시기는 기원전 44년경. 공화정이 무너져가는 시기에 원로원에 입성한 키케로의 불안이 반영되어 있다. 원로원의 권위를 회복하고 지금까지 누렸던 특권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그 책을 썼다는 것이다.
결국 키케로가 말한 노년의 지혜란, 가난한 노인이 아닌 부유한 원로원 의원들의 정치적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였다.
나는 이 대목에서 뜨끔했다. 요즘 쏟아지는 '행복한 노년을 위한 재테크', '100세 시대 준비하기' 같은 책들도 결국 똑같은 거 아닌가. 여유 있는 노년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모으는 건 개인의 책임이라는. 가난한 노인들은 애초에 그 책의 독자가 아니다.
도연명이 보여준 이상적인 노년
1부에서 이상적인 노년의 표상으로 꼽을 만한 인물은 4~5세기를 살았던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다.
도연명은 41세에 팽택 현령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 유명한 『귀거래사』는 이때 쓴 작품이다.
"돌아가련다. 전원이 바로 거칠어지려는데 아니 돌아갈소냐.
마음이 몸의 노예가 되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마음 내키는 대로 살기 위하여 자연으로 돌아갔다."
도연명은 벼슬을 좇느라 "마음이 몸의 노예가 되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농사지으며 농민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의 순박함으로부터 배웠다. 늙음과 죽음을 불안해하며 갈등하기도 했지만, 결국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순응하기로 한다.
41세.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하다. 도연명은 이 나이에 이미 자신의 인생이 잘못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과감히 방향을 틀었다.
나는?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도연명처럼 용기 있게 돌아설 수 있을까. 아니, 돌아갈 전원이 나에게 있기는 한가.
정약용의 자유로운 노년
2부에서는 근대 이후의 노년 사상을 살핀다. 이 시기도 노년에게 적대적이었다. 많은 예술작품이 노년을 추하고 혐오스러우며, 탐욕이 많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런 가운데 박홍규가 이상적으로 꼽는 인물은 정약용과 톨스토이다.
정약용은 말년에 비로소 중국의 말과 글에서 벗어나 조선 말로 조선 시를 쓰게 되었다고 기뻐한다. 그리하여 「노인일쾌사」 5수에서 노인의 기쁨 중 하나가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씀"에 있다고 한다.
"나이 칠십에 전통이나 관습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비타협의 참된 지식인이 되었다."
칠십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졌다는 말. 그 전까지는 자유롭지 못했다는 뜻이다. 관습과 전통, 타인의 시선, 체면과 의무에 묶여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마흔 후반인 나는 자유로운가. 아직도 눈치 보고, 체면 지키고, 남들처럼 살려고 애쓴다. 정약용은 칠십에 자유로워졌는데, 나는 언제쯤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톨스토이의 참회와 노동
톨스토이는 생애 3분의 2가 지났을 때 농부의 삶이야말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고 참회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이 시기 그가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모든 권위를 철저히 비판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자신만의 종교관을 구축하였다는 점을 이 책은 주목한다. 바로 거기서 삶에 필요한 노동을 스스로 할 것과 비폭력 무저항을 주장한 톨스토이주의가 나왔다.
귀족이었던 톨스토이가 노년에 농부의 삶을 선택했다는 것. 권위를 버리고 노동을 선택했다는 것.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우리는 어떤가. 나이가 들수록 권위에 집착하고, 대접받기를 원하고, 편하게 살기를 바란다. 톨스토이와 정반대로 간다.
늙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노년 사상이 필요하다
저자는 말한다.
"노년에 대한 사상가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공소한 것들입니다. 나는 그것을 비판하고 뒤집어야 늙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 쓰일 수 있다고 봅니다."
부유한 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쓴 노년 사상을 오늘날 우리가 절대적인 진리처럼 섬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노인 빈곤율을 자랑한다. 혹자는 수명만은 대폭 늘어나지 않았느냐 말하지만, 어쩌면 실제로 늘어난 것은 "노년의 비참함"인지도 모른다. 노인 빈곤율과 마찬가지로 치솟는 노인 자살률이 그 증거다.
이 통계를 읽으며 나는 식은땀이 났다. 지금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산다 해도, 노년에 가난하면 존엄은 없다는 뜻이다. 늙고 가난하면, 그냥 비참하다는 뜻이다.
정년 연장이 아닌 사회 패러다임의 변화
일각에서는 길어지는 평균 수명과 치솟는 노인 빈곤율에 대응하여 정년을 늘리고 노인들을 재교육하여 계속 노동하게 하자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사회에 기여'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박홍규는 단호히 말한다.
"지금과 같은 노동이나 교육은 노인들은 물론이고 청년들에게도 더 이상 시켜서는 안 된다."
맞다. 정년을 연장한다고 해서 노년의 존엄이 지켜지는 게 아니다. 칠십까지 택배를 날라야 하는 사회가 정상인가. 팔십까지 경비 일을 해야 먹고 사는 사회가 정상인가.
따라서 이 책은 "노년 사회보장의 확립을 전제로 한 노년의 창조성 앙양"을 주장한다.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고 "굶주리고 병들어 죽지 못해 겨우 살아가는 형편"에는 창조력이 싹틀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노인이 자유롭게 해방되어 창조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 패러다임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이 책은 노인들이 먼저 각성하여 그러한 '혁명'에 앞장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아직 늙지 않은 자의 두려움
나는 아직 노년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노년이 두려운 이유는 늙음 자체가 아니라, 늙고 나서 가난하고 외롭고 무력해질 것 같은 공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키케로의 노년론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건 부유한 원로원 의원의 이야기다. 도연명의 귀거래는 낭만적이다. 하지만 그에겐 돌아갈 전원이 있었다. 정약용은 칠십에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을 할 수 있었던 양반이었다.
그들의 노년론은 아름답지만, 그건 특권층의 노년이다. 늙고 가난한 사람들의 노년은 거기 없다.
박홍규가 이 책을 쓴 이유도 바로 그거다. 부유한 자들의 노년 철학이 아닌, 늙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노년 사상이 필요하다고.
노년은 창조의 시기여야 한다
이 책은 기존의 노년 사상을 톺아보고 그것에 대한 비판을 종합하여 소박하고 자유로우며 창조적인 노년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으로 끝난다.
창조적인 노년.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노년이 아니라, 자유롭게 무언가를 창조하는 노년. 체면과 권위를 버리고,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 노년. 정약용처럼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쓰는" 노년.
그런 노년이 가능하려면,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노년의 생존을 보장해야 한다. 그래야 노인들이 창조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 늙지 않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노년이란 무엇인가 — 나에게 남은 질문
책을 덮으며 나는 묻는다.
나는 어떤 노년을 맞이하고 싶은가?
키케로처럼 권위를 지키려 애쓰는 노년인가?
도연명처럼 자유로운 노년인가?
아니면 생존을 위해 죽을 때까지 노동하는 노년인가?
40대 후반. 아직 노년은 아니지만 가까워지는 나이. 이제 선택해야 한다. 어떤 노년을 준비할 것인가.
저자는 노년 사회보장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노인들이 먼저 각성하여 혁명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전에, 아직 늙지 않은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가 노인을 대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늙고 가난한 노인을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 노년의 권위가 아니라 노년의 존엄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바꿔야 한다. 지금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져야 한다. 관습과 체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노년에 자유로울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노년이 두렵지 않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 그리고 나 자신도 도연명처럼, 정약용처럼, 자유롭고 창조적인 노년을 준비하겠다고.
어렵겠지만, 해볼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노년은 비참함이 아니라 창조여야 하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늙기 때문이다.
이책 또한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노년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준비해야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