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언 & 생각

내일모레 50, 나는 잘 살고 있나?

SSODANIST 2025. 12. 23.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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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 서툰 영웅들의 자화상

회사에선 이제 '뒷방 늙은이'. 어쩌다 한 번 아이디어를 내면, 젊은 팀원들은 세련되게 포장된 '배려'라는 이름으로 나를 구석으로 밀어낸다. 훈장처럼 달고 다니던 '핵심 인재'라는 낡은 타이틀이, 이제는 짐처럼 느껴지는 나이. 쉰 살의 문턱. 세상의 중심에서 조용히 밀려나고 있는 듯한 이 낯선 소외감이 가장 괴롭다.

"야, 너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냐?"

매일 아침, 거울 속의 낯선 남자에게 내가 묻는 말이다. 수십 번씩 맴도는 이 질문.

이게 나만 하는 고민일까? 아니겠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쉰 살 가장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우리 세대의 보편적인 넋두리일 것이다.

 

지난주에 한 번은 회의 시간에 내가 한 말이 완벽하게 무시당했다. 정확히 말하면, 듣고는 있었지만 듣지 않는 척이었달까. 젊은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빛은 이미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난 후, 복도에서 우연히 들은 그들의 대화. "아, 그분 말씀은 좀… 요즘 트렌드랑은 좀 거리가 있잖아요."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지만, 내 가슴팍에는 비수처럼 꽂혔다.

가장(家長), 끝없는 역할극의 주인공은 지친다

내 어깨는 한 번도 가벼운 적이 없었다. 회사의 실적, 아이의 학원비, 늙어가는 부모님의 병원비, 그리고 갱년기로 예민해진 와이프의 눈치까지. 인생의 사방에서 쏟아지는 이 모든 책임들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외로운 수비수. 나는 늘 그래왔다.

 

회사에서는 구세대. 끊임없이 새로 배우고 적응하려 하지만, 젊은 애들 눈빛에선 '시간의 흐름'이라는 무거운 벽이 느껴진다. 노력만으론 안 된다는 걸 깨달을 때의 그 씁쓸함이란.

집에 와서 숨 좀 돌리려 하면, 훌쩍 커버린 아이들은 아빠의 낡은 조언보다는 자기만의 세상을 주장하며 등을 돌린다. 이제 나랑 대화하는 시간보다 스마트폰 보는 시간이 더 많다. "아빠, 그건 좀 옛날 얘기예요." 내가 조언을 시작하면 "아, 알았어요" 한마디로 차단한다. 헌신했던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 대화는 어색하고 서툴다. 문득, '내가 이 가족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는 회의감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나는 고개를 숙인다.

 

와이프는 갱년기라는 인생의 고갯길을 힘겹게 넘고 있다.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이면 지친 얼굴로 일어난다. 나도 힘들지만 그녀도 힘들다는 걸 안다. 그런데 그 힘듦을 서로 나누지 못하고, 각자 삼키고만 있다. 부모님들은 쇠약해지는 건강 앞에 점점 작아지신다. 병원에 다녀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동안 나는 천장만 쳐다본다. 이 모든 걸 챙기는 일은 여전히 가장인 내 몫이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을 돌볼 여력은 이제 깡통처럼 비어버렸다. 모두가 행복한 척, 애써 괜찮은 척 역할극을 펼치지만, 밤에 혼자 마시는 소주 한 잔 속에 비치는 나는 갈 곳을 잃은 표정이다. 창밖을 보면서 생각한다. "나는 누구를 위해 사는 걸까. 아니, 내가 산다는 게 맞긴 한 걸까."

🤔 '나다움'을 잃어버린 방황, 이대로 끝일까

"지금이라도 뭔가 내 것을 찾아야 할까? 아니면 그냥 다들 이렇게 사는 걸까?"

우리는 '가족을 위한 희생'을 미덕으로 배우며 자랐다. 젊은 날의 꿈과 열정? 그딴 건 가장이라는 이름표 아래 깊숙이 묻어버렸다. 스물다섯 살 때, 나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고 싶어 했다. 서른 살 때는 여행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꿈들은 '현실'이라는 이름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고, 집을 사고, 부모님을 봉양하면서… 나는 '나'를 조금씩 지워나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누구의 아빠', '누구의 남편'이 아닌,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턱밑까지 숨 막히게 조여 온다. 거울을 보면 낯선 사람이 서 있다. 배가 나오고, 머리숱이 줄고, 주름이 늘었다. 그런데 가장 낯선 건 그 외모가 아니라, 그 눈빛이다. 언제부터인가 내 눈에서 반짝임이 사라졌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이상한가? 그럴 리가. 이 고민은 내가 아직 살아있고, 발버둥 치고 있으며, 더 나은 삶을 갈망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죽은 사람은 고민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리고 살아있다면, 이 답답함과 허무함도 견뎌낼 수 있다.

 

세상이 변해가는 것에 적응을 못하는 걸까? 어쩌면 세상은 미친 듯이 변했지만, 나의 역할은 지독하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여전히 가족을 지탱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데, 세상은 이제 그 책임만큼의 보상을 주지 않는다. 회사는 나를 '경험 많은 중견'이 아니라 '인건비 높은 부담'으로 본다. 아이들은 나를 '인생의 멘토'가 아니라 '구닥다리 꼰대'로 여긴다.

 

이 답답함과 의욕 없음. 이건 그냥 우리가 겪는 자연스러운 번아웃이다. 지친 몸과 마음이 멈춰 서서, 이제는 '나'에게도 숨 쉴 틈을 달라고 처절하게 신호를 보내는 것일 뿐이다. 그 신호를 무시하면 안 된다. 이미 너무 오래 무시해 왔다.

🕊️ 다시, 서툰 영웅으로 일어서기

난 완벽한 슈퍼맨이 아니었다. 그저 묵묵히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해 온, 서툰 영웅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했다. 아니, 충분해야 한다. 더 이상 나 자신을 채찍질하지 말자. 이제부터는 '희생'보다는 '나 자신과의 화해'를 시작해야 한다.

 

잠시 멈춰 서는 용기, 짊어져 온 짐을 잠시 내려놓자. 의욕이 없는 나 자신을 탓하지 말고, 지쳐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안아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얼마 전, 나는 처음으로 회사에 반차를 냈다. 특별한 일정도 없었다. 그냥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카페에 앉아 창밖을 보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두 시간이 나를 조금 살렸다.

 

새로운 '나다움' 찾아보기였다. '나다움'을 거창한 젊은 날의 꿈이 아닌, 지금의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작은 것에서 찾아보자. 늦은 나이의 뻘짓거리, 잊고 있던 취미, 혼자만의 막걸리 한 잔이라도 좋다. 나는 다시 써놨던 여행기를 꺼냈다. 이십 년 만이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히미 하지만 기억이 난다. 서툴렀고 모자랐지만 이건 남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니까 괜찮다.

 

그리고 늘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기로 했다.

나랑 똑같은 고민을 하는 동년배 친구, 동료들과 털어놓고 말해보자. 고민을 털어놓는 순간, '나만 이렇게 답답하게 사는 게 아니었구나'라는 가장 큰 위로를 얻게 될 거다. 지난주에 대학 동기와 술을 마셨다. 그 친구도 똑같았다. 회사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느낌, 아이들과의 거리감, 와이프와의 미묘한 긴장감. 우리는 밤새 그런 이야기를 했다. 해결책은 없었다. 하지만 위로가 됐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세상은 원래 복잡하고, 변하는 게 당연하다. 중요한 건, 이 지옥 같은 삶 속에서 내가 여전히 주인공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서툰 영웅이지만, 그래도 영웅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때론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면 된다.

이 방황의 시기가 끝난 후, 나는 뒷방 늙은이가 아니라 '인생 2막'을 여는, 조금은 지혜로운 새로운 영웅으로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럴 수 있다고, 믿어야지. 아니, 믿는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살아있고, 아직 싸우고 있고, 아직 희망을 놓지 않았으니까.

 

쉰 살의 문턱에서, 나는 다시 한번 거울 속의 나에게 묻는다. "야, 너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냐?" 그리고 이번엔 대답한다.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나아지고 있어. 천천히, 서툴게, 그래도 확실하게."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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