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 없는 책임은 침묵을 낳고, 책임 없는 권한은 부패를 부른다

한국 사회의 위계적 문화는 여전히 조직 곳곳에 깊게 배어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계 속에서 기업은 민첩함과 창의성,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요구받고 있지만, 현실의 많은 조직은 여전히 '윗선의 지시'를 기다리는 방식에 머물러 있다. 권한은 위로 쏠리고, 책임은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 이 기형적 균형은 침묵과 부패를 낳으며, 결국 기업의 경쟁력을 잠식한다.
'권한 없는 책임'이 만들어내는 침묵의 조직
한 스타트업 PM이 있었다. 그는 고객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제품 구조 변경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결정권은 다른 부서에 있었다. 권한은 없었지만, 문제가 생기면 그가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였다. 결국 그는 조용히 '리스크를 줄이는 선택'을 택했다. 침묵은 안전했다. 하지만 회사는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잃었고, 시장에서의 경쟁력도 잃었다.
이 사례는 특이 케이스가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의 67%가 "의견을 제시했다가 불이익을 받을까 두렵다"라고 답했다. 많은 한국 기업에서 실무자는 결정권 없이 책임만 떠안고 있다. 실패하면 "왜 미리 보고하지 않았느냐"는 질책이 돌아오지만, 성공한다고 해서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다.
한 중견기업 마케팅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신규 캠페인을 기획해도 모든 단계에서 임원 승인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캠페인이 실패하면 '왜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느냐'는 질책을 받죠. 결정은 위에서 하고, 책임은 우리가 집니다. 이제는 과감한 시도보다 '안전한 평범함'을 택하게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 누가 과감한 실험을 하겠는가. 침묵은 전략이 되고, 회피는 생존 기술이 된다. 문제는 이것이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시스템의 결함이라는 점이다. 권한 없는 책임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조직을 정체시킨다.
'책임 없는 권한'이 만들어내는 부패
반대로, 권한은 많으나 책임은 지지 않는 리더십도 문제를 키운다. 어느 대기업 본부장은 신규 사업 투자를 강행했지만, 2년 만에 300억 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는 "시장 환경 변화 때문"이라며 책임을 회피했고, 오히려 "도전적 시도"로 포장해 승진했다. 반면 실무 팀장들은 인사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몇몇 중간관리자는 보고를 받기만 하고, 잘못되면 아래를 탓하고, 성과가 나면 윗선에만 자신을 어필한다. 2023년 직장 내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 기업의 리더십 신뢰도는 OECD 국가 중 하위권에 머물렀다. 조직은 투명성을 잃고, 신뢰는 붕괴한다. 부패와 비효율은 여기서 시작된다.
한 공기업 직원은 익명으로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 임원은 모든 회의에서 '창의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하지만, 정작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면 '그게 될 것 같아?'라며 즉시 꺾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왜 아무도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느냐'라고 따집니다. 권한은 독점하고 책임은 분산하는 겁니다."
권한과 책임이 비대칭인 조직에서는 공정함이 설 자리가 없다. 공정함이 무너지면 사람은 '내 역할'보다 '내 자리'를 지키는 데 에너지를 쓰기 시작한다. 이는 결국 조직의 창의성과 민첩성을 마비시킨다. 같이 일해본 한국의 대기업중 유독 한 기업의 분위기가 정말 이대로였다. 결국 그 기업은 몇 년 전부터 지속 내리막을 걷고 있다.
변화 속도가 빨라지는 시대, 리더십은 달라져야 한다
AI의 AI에 의한 AI를 위한 세상, 초연결 시대, 팬데믹 이후의 불확실성 속에서 기업이 생존하려면 더 나은 의사결정 구조가 필요하다. 넷플릭스는 "Context, not Control(통제가 아닌 맥락)"이라는 원칙으로 직원에게 과감한 권한을 주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투명하게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것이 초기 넥플릭스의 성공의 핵심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위계적 구조를 고집하던 많은 전통 기업들은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퇴보했다.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식 구조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현장의 실무자가 고객과 시장을 가장 잘 알고 있음에도, 그들의 판단이 세 단계 결재를 거쳐야 한다면 이미 기회는 사라진다. 과거의 방식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한국 기업이 가야 할 방향
실효성 있는 전환을 위해 다음과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
권한과 책임을 함께 부여하는 구조 설계
실무자에게 결정권을 주고, 그 결정에 대해 합리적인 범위의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스웨덴 가구 기업 IKEA는 매장 관리자에게 상품 배치, 프로모션 기획, 인력 운영 등의 전권을 주지만, 동시에 분기별 실적과 고객 만족도에 대한 명확한 책임도 부여한다. 이 구조 덕분에 각 매장은 지역 특성에 맞춘 민첩한 대응이 가능하다.
결정권 없이 책임만 지는 구조는 혁신을 죽이고, 의욕을 소진시킨다. 특히 스타트업은 속도가 생명이다. 과감한 권한 위임 없이 성장은 불가능하다. 한 국내 핀테크 스타트업은 팀장급에게 3천만 원 이하 마케팅 예산 집행권을 주고, 대신 월간 성과 보고를 의무화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의사결정 속도는 3배 빨라졌고, 직원 만족도는 40% 상승했다.
리더의 책임이 모호해지지 않도록 명확한 Accountability 구축
권한을 가진 만큼 리더는 그 결과에 대해 명확히 책임져야 한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Two-way door decisions(되돌릴 수 있는 결정)"과 "One-way door decisions(되돌릴 수 없는 결정)"을 구분하며, 후자에 대해서는 리더가 직접 책임지는 구조를 명확히 했다.
이것은 처벌의 문제가 아니다. 투명성과 신뢰의 문제다. 한 IT 대기업은 부서장 평가 시 '의사결정 투명성' 항목을 30% 반영하기 시작했다. 결정 과정을 명확히 기록하고, 결과에 대해 솔직하게 공유한 리더들이 높은 평가를 받았고, 조직 내 신뢰도가 눈에 띄게 상승했다.
정보 투명성 강화와 의사결정의 기록화
결정 과정이 투명할수록 책임과 권한의 배분은 공정해진다. "누가 어떤 판단을 왜 내렸는가"를 기록하고 공유하면, 조직 내 부정적 정치가 줄어든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BCG는 모든 주요 의사결정을 '디시전 로그(Decision Log)'에 기록한다. 누가, 언제, 어떤 근거로 결정했는지가 투명하게 공유되면서 "왜 그랬냐"는 사후 공격보다 "다음엔 어떻게 개선할까"라는 학습 문화가 자리 잡았다.
실패에 대한 합리적 관용
권한을 주고 실패하면 처벌하는 구조에서는 누구도 성장하지 못한다. 구글의 'X 프로젝트'는 실패한 프로젝트 팀에게 보너스를 지급한다. 빠른 시도와 빠른 학습을 장려하기 위해서다. 반면 한국의 많은 기업은 한 번의 실패를 '경력의 오점'으로 낙인찍는다.
실패를 '학습'으로 전환하는 문화 없이는 권한 위임도, 창의성도 존재할 수 없다. 한 국내 게임 회사는 '실패 회고전'을 정기적으로 열어 실패한 프로젝트의 교훈을 전사에 공유한다. 담당자를 비난하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배웠는가"에 집중하자 직원들의 도전 횟수가 2배 증가했다.
리더십 평가 기준의 재설계
성과만 보는 평가로는 권한과 책임의 건강한 균형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는 CEO 사티아 나델라 취임 후 리더 평가에 '팀원 성장 기여도'를 30% 이상 반영하기 시작했다. 단기 실적보다 팀의 장기 성장을 이끈 리더들이 승진했고, 조직 문화가 근본적으로 변했다.
조직 문화 기여도, 구성원 성장 지원, 의사결정의 투명성 등 '질적 리더십'을 평가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한국의 어느 제약 회사는 임원 평가에 '360도 피드백'을 50% 반영한다. 부하 직원들의 평가가 승진을 좌우하면서, 권위적 리더십은 사라지고 코칭형 리더십이 확산됐다.
앞으로를 위한 제언
조직이 성장하려면, 구성원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힘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 힘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적절한 권한, 공정한 책임, 투명한 구조 속에서만 만들어진다.
리더들에게는 묻고 싶다. "지금의 리더십은 변화 속도를 따라가고 있는가?" 당신이 10년 전과 같은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한다면, 조직은 이미 뒤처지고 있다.
조직 구성원에게도 질문하고 싶다. "당신에게 권한이 있었다면, 오늘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그 답이 분명하다면, 당신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시스템의 변화다.
한국 기업이 더 큰 도약을 꿈꾼다면, 권한과 책임의 균형을 다시 설계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직의 민주성이 생존 전략이 되는 시대다. 이 균형을 바로잡는 것이 한국 기업의 미래 경쟁력이 될 것이다.
더 이상 침묵하는 조직, 부패하는 리더십을 방관할 수 없다. 변화는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