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와 인간, 그 오래된 동행

제목: 탄소와 인간, 그 오래된 동행
지은이: 김서형
출판: 믹스커피
출간: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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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와 인간, 그 오래된 동행 | 김서형
우주를 구성하는 수많은 원소 중에서 인류의 기원과 문명, 미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탄소’다. 이 책은 탄소를 통해 우주의 시작부터 생명의 탄생, 문명의 발전, 현재 마주하는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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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잔해에서 탄생한 우리, 탄소의 이야기
김서형, 《탄소와 인간, 그 오래된 동행》(믹스커피, 2025)
어느 겨울 저녁, 연필을 손에 쥐고 글을 쓰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흑연 심이 수억 년 전 땅속 깊은 곳에서 형성된 탄소라는 것을. 내가 숨 쉴 때마다 내뱉는 이산화탄소가 나무를 키우고, 그 나무가 다시 종이가 되어 내 손에 쥐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탄소와 함께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쳐왔던가.
김서형 박사의 《탄소와 인간, 그 오래된 동행》은 바로 이런 일상의 무심함에서 출발해, 우주의 시작부터 인류 문명의 현재와 미래까지를 관통하는 거대한 서사를 펼쳐 보인다. 이 책은 단순한 과학서가 아니다. 138억 년의 우주사를 탄소라는 하나의 원소를 통해 풀어낸 장대한 철학서이자, 우리 자신의 기원과 존재를 성찰하게 만드는 인문학적 탐구다.
별이 남긴 유산, 생명의 알파벳
우리는 모두 별의 자녀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저자는 책의 첫 장에서 별의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과정을 통해 탄소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설명한다. 수소가 헬륨으로, 헬륨이 다시 탄소로 변환되는 이 과정은 단순한 화학 반응이 아니라, 우주가 생명을 준비하는 장대한 서곡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이 과정을 천문학적 사실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지질학, 생물학, 심지어 각국의 창조 신화까지 동원하여 탄소가 생명의 기본 단위가 된 이유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책을 읽다 보면, 내 몸을 구성하는 탄소 원자 하나하나가 어쩌면 수십억 년 전 초신성 폭발에서 튀어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묘한 경외감이 든다.
시간의 기록자로서의 탄소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4장에서 다루는 '시간의 기록자'로서의 탄소였다. 토리노 수의의 진위를 밝혀낸 탄소-14 연대 측정법, 프랑스 쇼베 동굴에 그려진 3만 년 전 벽화, 한국의 소로리 볍씨까지. 탄소는 인류 역사의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열쇠였다.
저자는 토리노 수의에 대한 과학적 분석 결과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탄소-14 측정 결과, 토리노 수의의 제작 시점은 1260년에서 1390년 사이로 판명되었다. 이는 수의가 예수의 시신을 감쌌다는 전통적 주장과는 약 1200년이나 차이가 나는 결과였다." 신앙과 과학이 충돌하는 이 순간, 탄소는 감정을 배제한 채 오직 시간의 진실만을 말한다. 중년의 나이가 되어 보니, 이런 냉정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용기임을 깨닫게 된다.
탄소 빈곤이 가져온 위기와 변화
5장에서 다루는 소빙기 시대의 탄소 빈곤 이야기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을 덮친 소빙기는 단순한 기후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식량 생산의 급격한 감소, 흑사병의 창궐,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졌다. 탄소를 기반으로 한 식량 생산 시스템이 무너지자, 인류 문명 전체가 흔들렸던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탄소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결국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나무를 태우는 것에서 석탄을 캐내는 것으로, 다시 석유를 추출하는 것으로 발전하면서, 인류는 땅속 깊이 묻혀 있던 고대의 탄소를 꺼내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에게 비약적인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기후 위기의 씨앗이 되었다.
미래를 위한 선택
책의 후반부는 탄소중립 시대를 준비하는 인류의 노력을 다룬다. 저자는 탄소섬유가 우주 산업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설명하면서 이렇게 적는다. "우주 탐사에서 무게는 곧 비용이다. 로켓 발사체에 실리는 물체의 무게 1kg당 비용은 수천만 원에 달한다. 중량이 줄어들수록 연료 소비는 이에 비례해 줄어들고 탐사 거리는 늘어나며 탑재할 수 있는 장비와 물자도 많아진다. 탄소섬유는 이러한 조건을 완벽히 충족시킨다."
탄소는 여전히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다만 이제 우리는 탄소를 태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영리하게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재생 에너지, 탄소 포집 기술, 지속 가능한 순환 경제. 이 모든 것이 결국 탄소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에 관한 것이다.
오래된 동행에서 배우는 지혜
이 책을 덮으며 드는 생각은, 우리가 탄소와 맺어온 관계가 곧 우리 자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별이 탄생시킨 탄소가 지구에 도착하고, 생명이 되고, 문명을 일으키고, 이제 위기를 맞이하기까지. 이 모든 과정은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저자 김서형은 현재 서울여자간호대학교 선임연구원으로, 빅히스토리 연구의 최전선에서 활동해온 학자다. 그의 글에는 과학자의 정확성과 인문학자의 통찰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어려운 과학 개념을 쉽게 풀어내면서도 깊이를 잃지 않고, 방대한 시공간을 넘나들면서도 독자를 길 잃게 만들지 않는다.
사십대 후반을 살아가며 느끼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깊은 통찰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통찰을 제공한다. 탄소라는 하나의 원소를 통해 우주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만든다. 우리가 별의 잔해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더 겸손해지고 동시에 더 당당해질 수 있다.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고, 연필로 메모를 하고, 숨을 쉬는 이 평범한 일상 속에 138억 년의 우주사가 담겨 있다. 《탄소와 인간, 그 오래된 동행》은 우리에게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렌즈를 선물한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이 오래된 동행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 각자는 작지만 소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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