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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 배움

한국에 중국 황제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_ 만동묘 Feat. 동묘

by SSODANIST 2024.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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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 그 역사를 찾아서] 

한국에 중국황제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사실 아는 사람이 많이 없지만 희한하게도 충북 괴산군 만동묘라 불리우는 사당이 있다.

어떤 사연으로 한국땅에 중국의 황제를 모시는 사당이 생긴 것일까?

오늘은 그 궁금증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중국황제를 기리는 사당 만동묘란? 

중국 명나라 황제 계보

 

3만동묘(萬東廟)는 조선 시대에 건립된 사당으로, 위의 표의 볼드 표시된 중국 명나라의 황제 신종(神宗:만력제)과 의종(毅宗:숭정제)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명나라와 조선 사이의 외교적, 문화적 관계를 생각하고 지었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구 시대의 의리를 상징하는  유적지이다. 

 

2. 만동묘의 역사

만동묘에 오르는 마지막 계단은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9층으로 된 돌계단으로 그 경사를 70도 내외로 가파르게 만들어 놓았다. 이는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의 백성이 감히 천자를 뵈러 올라가면서 똑바로 서서 올라갈 수 있느냐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본다. 이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일반적인 자세로는 올라가기 힘들므로 몸을 굽히고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 여기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명나라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만동묘는 조선 후기의 국정을 당파싸움의 아수라장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명나라 왕(신종과 의종)을 모시기 위해 세웠다

참고로 신종은 임진왜란 때 군사를 파병했고 의종은 명의 마지막 왕이다.

2-1. 임진왜란과 만력제: 

만동묘 그 건립의 배경은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준 고마운 이가 있는데 바로  중국 명나라 황제 만력제(萬曆帝·1563~1620년)이다. 만력제는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자 바로 원군을 파병했고, 전쟁 복구 과정도 도운 인물이다.   

조선은 한양마저 위태롭게 되자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간절히 요청했다. 그 무렵 명도 황제(만력제)가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는 등 사정이 썩 좋지 않아 신하들은 반대했다. 하지만 만력제는 사흘 만에 파병을 결정한다. 

만력제는 군사 5000명과 은화 2만냥을 선조에게 보냈다. 그리고 조선의 백성이 굶는다는 말을 듣고는 명나라 최대 곡창 중 하나인 산둥성의 쌀 100만석을 은화 100만냥을 주고 구입해 조선에 보냈다. 이는 조선의 쌀 수확량 10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다. 


만력제는 이후 정유재란에도 20만명의 군사를 조선에 파병했고, 그에 대한 비용으로 은화 500만냥을 마련해줬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두 차례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선의 전후복구를 위해 내탕금(內帑金·임금의 개인재산)에서 은화 200만냥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아낌없이 조선을 도와줘 ‘조선천자’, ‘고려천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전 국력을 기울여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하고나서 명나라는 재정파탄에 시달리다가 40여년 후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 조선을 구한 만력제는 중국역사에는 역사상 최악의 암군으로 기록돼있다. 

 

이런 스토리만 보면 정말 영화같다.

 

재미있는 썰: 

원래 만력제는 그다지 조선 파병에 관심이 없었다가 하루는 꿈을 꿨는데 관우가 나와서 선조가 장비의 환생이고 만력제가 유비의 환생이라고 했다고 한다. 관우가 울면서 장비를 구해주라고 하고 꿈에서 사라지자 만력제는 그때부터 조선 파병을 강력히 주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지만 서울의 한 지명은 이 야사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동묘'다. 삼국지의 영웅 관우를 동관왕이라 칭하는데 그 동관왕묘가 모셔진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에서 관우의 혼이 명나라 군사를 도왔다는 신앙이 퍼지면서 군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명나라에서 칙령이 내려와 건립됐다. 이를 보면 아주 신빙성이 없는 야사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https://www.kocis.go.kr/koreanet/view.do?seq=7277

 

한국 속의 중국문화: 동관왕묘에서 조선국왕의 마음을 엿보다

SNS 공유 주소복사 인쇄하기 한국 속의 중국문화: 동관왕묘에서 조선국왕의 마음을 엿보다 2017.01.24 ▲ 동관왕묘에 모셔진 촉한의 장수 관우의 모습. 고종은 1902년 관왕을 황제로 높이는 칭호 ‘

www.kocis.go.kr

 

2-2. 만동묘의 건립

 

만동묘 설립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로 거슬러 올라간다.

https://namu.wiki/w/%EC%86%A1%EC%8B%9C%EC%97%B4

 

송시열

학문은 마땅히 주자 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 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 북벌론 )을 주로 삼으라. 죽기 전

namu.wiki

 

화양동 계곡은 원래 황양목이 많아 ‘황양동’(黃楊洞)으로 불렸다. 그러다 송시열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면서 ‘화양동’으로 고쳐 불렀다. 벼슬에서 물러난 송시열은 곧바로 이 화양동에 서원을 짓고 머물며 글 읽으며 제자를 가르쳤는데 송시열은 화양동 계곡의 기이하고 아름다운 아홉 곳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하였다.여기 바로 화양동서원과 만동묘가 있다.

 

송시열은 죽기 전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구원해준 명나라의 신종과 마지막 황제 의종에게 고마움과 의리의 예를 지키기 위한 사당을 지어 제사지내도록 제자들에게 유언하였다. 그런데 당시 는 이미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멸망한 지 50여 년이 지났던 시기라 그 본뜻이 좀 궁금해 진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214039#home

 

[e글중심] 만절필동(萬折必東), 진짜 뜻은? | 중앙일보

"이 바위는 가평군수 이제두 등이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의 은혜와, 청나라에 당한 굴욕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글씨 ‘사무사(思無邪)’와, 조선

www.joongang.co.kr

 

만절필동은 '황하가 아무리 많이 굽이쳐도 결국에는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충성하는 사람의 절개 를 나타낼 때 비유하는 단어이다. 화양계곡에 있는 만동묘의 만동'은 '만절필동'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후 만동묘는 유생들의 집합장소가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욱 심해졌다. 이에 1865년  고종은 조정에서는에서 명나라 황제 제사를 지내므로 개인적으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지장의 제사 기능을 조정으로 옮기고 만동묘를 철폐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서원철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303500&code=kc_age_30

 

우리역사넷

조선 중기 이후 붕당 정치의 발달과 더불어 차츰 중앙의 집권세력과 서원이 밀접하게 연결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후 숙종 시기 잦은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숙청된 인물들의 정치적 복권을 기

contents.history.go.kr

 

그 뒤 유생들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활되지 않다가 1873년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유림들이 소를 올려 이듬 해인 1874년 왕명으로 다시 부활되었다. 이것은 민비(閔妃) 일파가 유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취한 조처였다.

 

이후 1907년 일본군이 우리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태웠으며, 이듬해에는 일본 통감이 만동묘를 폐철함과 동시에 재산을 국가 또는 지방관청에 귀속시켰다. 

 

그 뒤 일제치하에서도 유림들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제향이 계속되다가 1940년부터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영영 끊기게 되었다. 마침내 1942년 만동묘 건물을 철거, 괴산경찰서 청천면 주재소를 짓는 건축자재로 사용하였다.

 

2-2 만동묘의 부활

1999년 우암 송시열 관련 유적이 국가지정문화재(사적417호)로 지정된 후 2002~2005년 만동묘 · 성공문 · 묘정비각 · 외삼문 · 증반청 · 존사청을 복원하였고 나머지  건물들도 복원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중화 사대사상의 상징과 같은 건물의 복원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고, 무엇보다 백성들을 수탈하던 만동묘의 악명이 있어서 이것 때문에 복원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많은 것으로 볼 때 조선의 소중화 사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임과 동시에 서원이 권력을 가지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건물로 볼 수 있다.

 

대체 누가 왜 복원을 지시했는지 정말 궁금한 대목이다. 이것도 모두 세금 아닌가?

이는 우리 사회 일각에 깊이 뿌리박힌 중화주의는 치료 불가능한 고질병으로 생각된다. 

 

3. 만동묘의 위치:
https://place.map.kakao.com/614261177?referrer=daumsearch_local

 

만동묘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청천면 화양리 393-2)

place.map.kakao.com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위치해 있으며 세부 주소는 아래와 같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우)28059

지번: 청천면 화양리 393-2

 

연중 무휴로 아무때나 둘러볼 수 있다.

 

4. 마무리 하며

사진_국민일보_사대주의 공방

인조반정의 근본적인 원인도 중국을 섬기는 사대주의 문제에서 기인했다.

더욱 한심했었던 점은 송시열과 그 일파인 노론들이 명나라를 섬기고자 할때는 명나라는 이미 망한 후였다는 점이다. 청나라에 패망하여 없어진 명나라를 추종하던 이들은 조선이 중화를 계승한다는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면서 실존하지도 않는 명나라를 마음 속으로 섬겼던 것이다.

 

뭔지 모를 이해 할수 없는 그들만의 이해관계가 정말 궁금해 지는 대목이다.

 

또한 노론은 명나라 황제를 섬긴다는 명목으로 조선의 왕을 제후라고 깍아내리고 압박하면서 자기당파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개혁을 막았으니 결국에는 나라가 망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정치가 맑아야 나라가 깨끗할 것인데.....이러한 노론의 마지막 대신(장관)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다.

 

만력제의 도움은 정말 고마운 일이나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시대 착오적 사대주의는 당연히 역사속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맞을것 같다. 좋은 역사를 통해서는 긍지를 배우지만 부끄럽운 역사에느 교훈을 얻어야 앞으로 나아갈수 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대체 왜 복원되었으며 무슨 돈이 쓰였고 무얼 얻고자 하였는지 이해가 안된다.

 

이것도 누군가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그렇게 하라고 일러준 것일까?

 

https://youtu.be/wU6Vnmmf1pk?si=zv5qU5u7NPfDGBI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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