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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 & 생각

브랜드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생산성의 시대에 우리가 잃어가는 것들

by SSODANIST 2025.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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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매장에서 느낀 묘한 거리감

명품 매장에서 직원들의 태도는 늘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다. 하지만 그 공손함 뒤에는 또 다른 감정이 숨어 있는것 같다. 10년 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왜 저들은 자신을 브랜드와 동일시 하는것 처럼 느껴질까?' 그들은 그 브랜드를 디자인한 사람도, 그 브랜드의 정신을 만든 사람도 아니다. 단지 브랜드의 간판이 걸린 매장에 서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어딘가, 브랜드의 혼을 부여받은 듯 마치 로고가 피부에 스며들어 자신의 일부가 된 것처럼 행동한다. 

그 거리감이 늘 이상했다. 그러나 더 이상한 건, 그것이 명품 매장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브랜드가 만든 가짜 정체성의 유혹

"너 어디 다녀?"

한국 사회에서 이 질문만큼 사람을 빠르게 재단하는 말이 또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기업명이 곧 사람의 '격'을 결정하는 기준이 됐다. S기업에 다니면 내가 S가 되고, Z에 다니면 내가 Z인 것처럼. 그 감각은 묘하게 달콤하고, 동시에 파괴적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저 N에 다녀요"라고 말할 때, 그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실려 있다. 그 순간, 그 사람은 N의 수많은 업적, 혁신, 브랜드 파워를 자신의 것처럼 입는다. 마치 빌린 옷처럼. 하지만 그 옷을 벗었을 때, 그 안에 남는 건 무엇일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대인은 자신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로 정체성을 정의한다. 하지만 진정한 자기 자신은 '존재'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브랜드를 소유한 게 아니다. 단지 그곳에 고용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회사에 다니니 인생 1티어'라는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퍼지면서 사람의 삶이 기업의 광택 아래서 줄 세워지기 시작했다.


티어 게임, 언제부터 우리의 삶을 나누기 시작했나

"1티어 대기업", "2티어 중견기업", "3티어 중소기업".

게임에서나 쓸 법한 이 용어들이 어느새 사람을 분류하는 언어가 되었다. 결혼정보회사의 프로필에는 직장명이 학력보다 크게 표시되고, 소개팅 자리에서는 "어디 다녀요?"가 가장 먼저 오가는 질문이 되었다.

예전에는 사람을 볼 때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마음을 지녔는지가 중요했다. 아버지는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었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신뢰를 기억했다. 어머니는 학력이 높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어머니의 지혜를 무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가 사랑하듯 빠져든 티어 게임은 사람을 층위로 나누기 시작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이름값이 낮은 회사에 다니면 그 사람의 '가치'도 거기에 머문다고 단정한다.

카페에서 후배를 만났다. 그는 20여년 여러 좋은 회사를 다니며 좋은 브랜드가 소비자의 손으로 전달되는 자랑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날 그가 말했다. " 형 요즘 아이 학교 학부모 모임 가기가 싫어. 다들 외제차 타고 대기업 다니는데, 나만 이름만 겨우아는 스타트업에 다닌다고하면... 뭔가 쪼그라드는 기분이야."

우리가 언제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의 삶 위에 가격표를 붙이는 존재가 되었을까.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아프다.


생산성이 인간의 가치를 대신할 수 없는 이유

"생산성을 높여라." "효율적으로 일해라." "더 많은 성과를 내라."

우리 시대의 주문이다. 하루 종일 귀에 박히도록 듣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이렇게 믿게 되었다. '생산성이 높으면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고, 낮으면 쓸모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를 구분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반복적 활동이고, 작업은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며, 행위는 인간이 서로를 향해 말하고 관계 맺는 것이다.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이것이다. 인간의 가장 고유한 가치는 '행위'에 있다는 것. 생산성이 아닌,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다움에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내가 벌어오는 연봉, 내가 만든 매출, 내가 찍어낸 성과는 단지 경제 시스템이 필요로 하는 '편의적 숫자'일 뿐이다. 그 숫자들이 나라는 사람의 품격을 증명할 수는 없다.

얼마 전 만난 한 간호사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밤샘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져요. 숫자로 남는 게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날 밤, 제 손을 꼭 잡고 고마워하던 환자의 눈빛은... 그건 숫자가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숫자가 높을수록 인간으로서의 가치도 높아진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언제나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스며들지만, 우리를 가장 깊게 갉아먹는 환상이다.


자본주의가 철학인 척할 때 벌어지는 일

자본주의는 철학이 아니다. 그저 돈을 어떻게 흘릴지 정해놓은 시스템일 뿐이다. 원래 시스템은 도구여야 한다. 인간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수단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어느 순간 삶의 기준이 되었고 인간을 판단하는 잣대처럼 군림하기 시작했다. 생산성이 높으면 좋고, 낮으면 부족하다는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졌다. 우리는 그 말에 반박할 틈도 없이 동의해 버렸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가?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는 《도넛 경제학》에서 묻는다. "우리는 왜 끊임없는 성장만을 추구하는가? 성장하지 않으면 실패한 것인가?" 그녀가 제안하는 건 '충분함'의 경제학이다. 더 많이가 아니라, 충분히. 더 빠르게가 아니라, 지속 가능하게.

 

하지만 우리 사회는 '충분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높이. 그 틀을 의심하지 않는 사이, 삶은 점점 더 얇아지고 사람은 더 쉽게 소모되기 시작했다.

30대 후배 직장인 한 명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제 가치를 증명하려고 매일 밤 11시까지 일해요. 그런데 이상한 건, 아무리 일해도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항상 더 해야 한다는 압박만 커져요."

이것이 생산성 강박이 만든 삶이다. 우리는 멈추는 법을 잃었다. 충분하다고 말할 용기를 잃었다.


삶의 가치는 다른 곳에 있다

인간의 가치는 생산성이 아니라 삶의 온도, 마음의 결, 관계의 깊이에서 생긴다.

작가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썼다. "나무는 하늘을 향해 자라지만, 그 뿌리는 언제나 땅을 향해 내려간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성공을 향해 뻗어 올라가지만, 진짜 가치는 보이지 않는 곳, 뿌리에 있다."

누군가를 오래 알고 나면 그 사람이 어디서 일하는지보다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 친구는 대기업을 나와 작은 동네에서 카페를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아깝다", "후회할 거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그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엔 매일 아침 거울 보기가 싫었어. 누군가의 부품 같았거든. 지금은 달라졌어. 내 손으로 내린 커피를 마시는 손님의 미소를 볼 때마다, 이게 내 삶이라는 게 실감나."

 

기업명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브랜드는 유행처럼 지나가지만 사람의 진짜 가치는 그 너머에서 조용히 빛난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말했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우리는 브랜드의 인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인정을 갈망한다. 우리가 어떤 회사에 다니는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를 봐주길 원한다.


다시,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연습

변화는 거창한 곳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작은 질문 하나에서 시작된다.

"너 어디 다녀?" 대신 "요즘 어떻게 지내?"

"연봉 얼마야?" 대신 "요즘 무엇이 너를 행복하게 해?"

"무슨 일 해?" 대신 "어떤 일을 할 때 살아있다고 느껴?"

언어가 바뀌면 시선이 바뀐다. 시선이 바뀌면 관계가 바뀐다. 관계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사람들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 때문에 괴로워한다."

우리를 옭아매는 건 회사 이름이나 연봉이 아니다. 그것들이 나를 정의한다는 '생각'이다. 그 생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브랜드보다 사람, 직장보다 나

브랜드는 사람을 대변할 수 없다. 직장은 삶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나는 어떤 이름으로 살아가고 싶은가?
내 가치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명함 위의 회사명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에 남고 싶지 않은가.

매출 보고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로 기억되고 싶지 않은가.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우리는 인간을 다시 사람으로 바라보는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10년 전 명품 매장에서 느낀 그 묘한 거리감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우리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브랜드의 그림자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다.

진짜 우리는 그 너머에 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어떤 회사에 다니는 누군가가 아니라, 당신 자신으로 충분히 빛나고 있다.


"사람이 먼저다. 브랜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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