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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두가지 인생이 있다.

by SSODANIST 2025.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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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 번의 삶을 산다

 

마흔을 넘기고 나서야 시작된 진짜 삶에 대하여

마흔을 넘기면 시간은 갑자기 빨라진다. 어느 날부터 달력이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한다. 밤을 새우면 회복이 늦고, 예전 같으면 웃고 넘겼을 통증이 며칠씩 남는다. 아직 늙었다고 말하기엔 이르고, 그렇다고 젊다고 우기기엔 몸이 정직해진 나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 속 얼굴이 조금씩 낯설어진다. 눈가의 주름이 깊어지고, 흰머리가 하나둘 늘어난다. 몸은 정직하게 시간의 흐름을 기록한다. 하지만 더 이상해진 것은 마음이다. 젊었을 때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이제는 당연하지 않다. '시간은 충분하다'는 막연한 믿음이 조용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삶은 대체로 비슷했다. 해야 할 일을 했고, 기대받는 역할을 수행했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 애썼다. 큰 실패는 피했지만, 큰 선택도 없었다. 나는 그걸 성실함이라고 불렀고, 책임감이라고 믿었다. 사실은 시간이 충분하다고 가정한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있었다. 쓰고 싶었던 글, 제대로 해보고 싶었던 일, 미뤄둔 대화들. 당장은 아니어도, 인생이라는 긴 줄 위에 언젠가는 도착할 것 같았다. 그 '언젠가'가 구체적이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던 이유는, 내일이 당연히 올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뿐이다."
세네카, <시간의 짧음에 관하여>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문제는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것을 20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지만, 사실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다. 중요하지 않은 일들로 하루를 채우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나중에'라는 서랍 속에 넣어둔다.

 

변화는 갑작스럽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도, 극적인 실패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이 반복되면서 생긴 묘한 공백이었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더 이상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여전히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회의가 열렸다. 집에서는 아이들이 자라고, 청구서가 날아왔다. 삶은 계속 굴러갔지만, 어딘가 공허했다. 마치 정해진 대본을 읽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게 전부일 수도 있겠구나."

 

"우리는 두 번의 삶을 산다. 두 번째 삶은 우리가 한 번만 산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시작된다." 
<공자의 말이라고 전해짐>

 

그 순간 떠오른 문장이다. 이 문장은 희망적으로 들리지만, 실제 경험은 그렇지 않았다. 이 깨달음은 나를 자유롭게 하기보다 오히려 불편하게 만들었다. 만약 정말 한 번뿐이라면, 나는 왜 이렇게 많은 선택을 미뤄왔을까. 지금까지의 판단들은 신중함이었을까, 아니면 회피였을까.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말고, 매일 조금씩이라도 나아가라." 그는 18년의 유배 생활 동안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시간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두 번째 삶은 용기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오히려 계산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실패의 대가가 너무 커 보였다면, 이제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은 채 지나갈 시간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졌다. 틀릴 가능성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더 두려워졌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오래전부터 쓰고 싶었던 글의 첫 문장을 적었다. 완벽하지 않았다. 어색했고, 어디로 흘러갈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었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조금씩 이어갔다. 대단한 결심이 아니었다. 다만 '나중에'라는 말을 한 번 덜 하기로 한 것뿐이었다.

 

놀라운 건, 삶이 갑자기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여전히 해야 할 일은 많고, 책임은 줄지 않았다.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저녁이면 피곤에 지쳐 집으로 돌아왔다. 다만 작은 것들이 달라졌다. 하기 싫은 일에 이유 없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 "괜찮으시죠?"라고 물으면, 괜찮지 않을 때는 "아니요"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마음에 남는 생각을 예전보다 빨리 적기 시작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준비가 덜 되어 있어도, "지금은 아니야"라는 말을 덜 하게 되었다.

 

작가 미치 앨봄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이렇게 썼다. "죽음은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 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지금 이 순간이 귀해진다.

물론 두 번째 삶을 계속 살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깨닫는 것과 유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여전히 편한 쪽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이 있고, 이미 쌓아온 정체성을 흔드는 일이 부담스럽다. 이 나이에 새롭게 시작한다는 건 멋진 문장보다 훨씬 현실적인 불안을 동반한다.

 

마흔 중반의 동료가 퇴사를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0년을 다닌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떠나 작은 카페를 열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무모하다고 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어요. 60이 되어서 후회하는 것보다, 지금 도전해보는 게 낫겠다 싶었거든요." 그는 실패할 수도 있다. 카페는 어려울 수 있고, 다시 직장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 '언젠가'를 '지금'으로 바꾸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을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다. 두 번째 삶은 인생을 바꾸라는 선언이 아니라, 태도를 바꾸라는 요구에 가깝다. 더 행복해지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적어도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완벽한 계획이 필요한 게 아니라, 미루는 습관을 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죽음은 네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묻지 않고, 무엇을 미루었는지 묻는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이제 나는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방향이 바뀌었다. 실패가 아니라,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시간을 통과하는 것이 더 무섭다. 잘못된 선택보다, 선택하지 않는 것이 더 큰 후회로 남을 것 같다. 아마 이 감각이 두 번째 삶의 시작일 것이다.

 

두 번째 삶은 늦게 시작해도 괜찮다. 마흔에 시작해도, 쉰에 시작해도, 육십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언제 시작하느냐가 아니라, 시작하느냐 마느냐다. 다만 이 삶은 조용하다. 환호도, 명확한 이정표도 없다. 다만 하루하루를 더 이상 연습처럼 살고 있지 않다는 감각만이 남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제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은 어떤 하루를 살 것인가.' 예전처럼 '오늘도 하루를 견뎌내야지'가 아니다.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이 마음가짐의 변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 하루는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선택하고 채워가는 시간이 된다.

 

최근까지도 어렸을때 꿈이 무엇이었는 묻는 사람들이 있다. 늘 그때 마다 '나도 이루지 못한 꿈이 많지'라고 쓸쓸하게 답했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대답할 수 있다. "되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면 되죠. 지금도 그래서 이것 저것 시작하고 있어요." 그리고 무었이 되겠다는 꿈은 명사에 머무르지않고 동사로써 그 꿈을 이루어 무엇을하겠다, 바꾸겠다는 꿈까지 꿔볼 수 있

그리고 그 감각이면, 지금은 충분하다.

"삶이 짧다고 불평하지 마라. 살아 있는 동안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을 탓하라."
 <에픽테토스>

 

우리에게는 정말로 두 번의 삶이 있다. 첫 번째 삶은 시간이 무한하다고 믿으며 사는 삶이고, 두 번째 삶은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사는 삶이다. 첫 번째 삶에서는 미룰 수 있지만, 두 번째 삶에서는 미룰 수 없다. 첫 번째 삶에서는 연습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삶에서는 연습이 곧 본무대다.

 

당신의 두 번째 삶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이 순간,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앎이 바로 두 번째 삶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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