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 흐림, 그리고 비가옴 화요일의 잔잔함
기온: 최저 -5도, 최고 5도
글 연습을 위해 쓰는 스타일을 좀 바꿔 봤다.
오늘 점심, 회사근처 북카페에서 작은 글쓰기 모임이 있었다. 5명의 참가자가 동그랗게 모여 앉았고, 자기소개 시간이 시작됐다. 한 분씩 돌아가며 자신을 소개하는데, 첫 번째 분이 "저는 10년차 작가입니다"라고 말했고, 두 번째 분은 "저는 문예창작과 출신이에요"라고 했다. 세 번째 분이 "저는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라고 소개하자, 나는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순간 입이 바짝 말랐다. 머릿속으로 '나는 뭐지? 그냥 읽고 쓰는 걸 좋아하고 이제 막 제대로 써보려고 시작한 초보인데...'라는 생각이 빙글빙글 돌았다. 예전 같았으면 분명히 포장했을 것이다. "저는...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서요"라고 애매하게 얼버무리거나, "취미로 좀 씁니다"라고 축소해서 말하거나, 아니면 "이것저것 해봤어요"라고 과장해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저는 최근에 처음 글을 제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이미 말을 시작했으니 계속 이어나갔다. "47살인데, 이제 시작했어요. 매일 5분씩 씁니다. 서툴고, 부족하지만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순간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싶어 후회가 밀려왔다. 그런데 한 분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와, 솔직하시네요. 보통은 다들 부풀리는데."
그러자 조금 전 10년차 작가라고 했던 분이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사실 저도 10년차라고 했지만... 진짜로 쓴 건 2년밖에 안 됐어요. 나머지는 그냥 꿈만 꿨죠." 문예창작과 출신이라던 분도 덩달아 말했다. "저도 문예창작과 나왔다고 했지만, 졸업 후 한 줄도 안 썼어요. 부끄러워서 못 말했어요." 내가 불완전함을 드러내니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1시간 동안 우리는 완벽한 작가가 아닌, 불완전한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나눴다. 모임이 끝난 후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오늘 처음으로 편했어요. 완벽한 척 안 해도 되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깨달았다.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용기, 그것이 진짜 연결을 만든다는 것을.
🌱 브레네 브라운 - "취약성이 힘이다"
휴스턴 대학교의 브레네 브라운 교수는 취약성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오랫동안 완벽주의자였다. 박사학위를 땄고, 교수가 됐고, 완벽한 강의를 했고, 완벽한 논문을 썼지만, 내면은 언제나 불안했다고 한다. '실수하면 안 돼. 약점을 보이면 안 돼. 완벽해야 해.'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며 살았다.
2010년, 그녀는 TED 강연에 초대받았다. "취약성의 힘"이라는 주제로 12년간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기로 했다. 그녀는 완벽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강연 전날 밤, 호텔 방에서 그녀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진짜 나를 보여주자. 불완전한 나를.' 다음날 무대 위에 섰을 때 그녀는 떨렸지만 시작했다. "저는 취약성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 자신도 취약성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불안을 고백했다. "저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나는 충분하지 않아'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공황발작도 이야기했다. "연구 중에 공황발작이 왔습니다. 1년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학자로서 실패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도 인정했다. "저는 수년간 제 연구 결과를 믿지 않았습니다. '취약성이 힘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제 취약성은 숨겼습니다."
강연이 끝났을 때 청중은 조용했다. 그리고 갑자기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제 불완전함을 인정할 용기가 생겼어요." 그 TED 강연은 6천만 뷰를 넘겼고, 역대 가장 많이 본 TED 강연 중 하나가 됐다. 완벽한 강연이어서가 아니라, 불완전함을 드러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브라운은 말했다. "취약성은 약함이 아니라 용기다. 불완전한 우리를 드러내는 것이 진짜 연결의 시작이다."
그녀가 12년간 수천 명을 인터뷰하며 발견한 것은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완벽함이 아니라 온전함(Wholeness)이라는 것이었다. 온전한 사람들은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취약성을 드러내고, 실수를 숨기지 않으며, "나는 충분하다"고 믿었다. 브라운은 이것을 "Wholehearted Living", 즉 진심으로 사는 삶이라고 불렀다.
💪 완벽한 척의 대가
나는 평생을 가면을 쓰고 살았다. 20대에는 SNS의 완벽한 삶을 연출했다. 싸이월드 미니홈피 시절부터 그랬다. 페이스북에는 승진 소식, 해외여행 사진, 행복한 가족 사진, 성공 스토리만 올렸다. 하지만 올리지 않은 것들이 훨씬 많았다. 야근으로 지친 모습, 아내와의 다툼, 승진 탈락, 깊은 밤의 외로움. 결과는 100개의 좋아요와 0개의 진짜 대화였다.
30대에는 완벽한 아빠가 되려고 애썼다. 아이 앞에서는 항상 "아빠는 항상 강해", "아빠는 안 힘들어", "아빠는 실수 안 해"라고 말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혼난 날도 있었고, 돈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밤도 있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슴이 답답한 날도 있었고, 아빠도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숨겼다. 결과는 아이가 힘들 때 나한테 말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아이도 나로부터 완벽한 척하는 법을 배워버렸다.
40대에는 완벽한 직장인이 되려고 했다. 회의에서는 "네,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없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해 못 한 것도 있었고, 도움이 필요한 순간도 있었고, 불안하고 한계를 느낄 때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숨기고 혼자 끙끙대다가 프로젝트가 지연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몸이 터져버렸다. 공황장애였다. 더 이상 완벽한 척 할 수 없었다. 정신과 의사 앞에 앉아 생전 처음으로 말했다. "저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많이 불안합니다. 도와주세요." 생전 처음 불완전함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의사가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을 하는 데 47년 걸렸네요." 그날부터 나의 회복이 시작됐다.
🏃♂️ 오늘의 달리기 - 불완전한 5분
새벽 공원을 뛰는데 오늘은 유난히 컨디션이 안 좋았다. 어제 늦게 자서 그런지 몸이 무겁고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감기기운도 있고....예전 같았으면 '완벽하게 5분을 뛰어야지, 안 되면 아예 안 뛰는 게 나아'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불완전해도 괜찮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그래서 2분을 뛰고 1분을 걸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뛰기와 걷기를 섞어서 5분을 채웠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완료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돌아오는 길에 한 할아버지가 지나가시며 말을 건넸다. "젊은이, 달릴만해요?" "네, 근데 아직 서툴러요."라고 대답하자 할아버지가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서툰 게 당연하지. 하는게 중요한 거예요. 잘하고 있어요." 불완전함을 인정하니, 격려가 왔다.
🔥 불완전함을 드러낸 사람들
캐나다의 시인이자 싱어송라이터인 레너드 코헨은 그의 노래 "Anthem(찬가)"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Ring the bells that still can ring, Forget your perfect offering, 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아직 울릴 수 있는 종을 울려라, 완벽한 제물은 잊어라, 모든 것에는 금이 가 있다, 그 금으로 빛이 들어온다는 뜻이다.
코헨은 평생 완벽주의자였다. 노래 하나를 완성하는 데 몇 년씩 걸렸고, 그의 대표곡 "Hallelujah"는 무려 80개의 버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평생 우울증, 불안, 중독과 싸웠고, 60대에는 불교 수도원에 들어가기도 했다. "완벽해지고 싶었어요. 하지만 불가능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 고통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금이 간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우울증을 노래에 담았고, 자신의 실패를 시에 썼고, 자신의 나약함을 무대에서 고백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은 모두 불완전함을 인정한 후에 나왔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저는 금이 간 종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울립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일본에는 킨츠쿠로이(金繕い)라는 전통 도예 수리 기법이 있다. 깨진 도자기를 금가루로 이어 붙이는 방법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균열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강조한다는 점이다. 서양에서는 깨진 것은 버리지만, 일본에서는 깨진 것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그들의 철학은 "깨진 역사가 물건을 더 가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완벽한 새 그릇보다 금으로 수선한 그릇이 더 비싸게 팔린다. 왜냐하면 상처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공황장애는 나를 깨뜨렸다. 하지만 치유 과정에서 나는 그 균열을 금으로 채웠다. 상처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저는 공황장애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힘듭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고백이 신기하게도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저도 그래요", "저도 힘들어요", "당신 덕분에 용기가 나요"라는 말들이 돌아왔다. 내 상처가 다른 사람의 위로가 되는 순간이었다.
🌙 오늘의 달리기, 오늘의 기록
5분을 뛰고 돌아와 노트를 펼쳐 오늘의 불완전한 순간들을 적었다. "완벽함은 연결을 막고, 불완전함은 연결을 만든다", "금이 간 곳으로 빛이 들어온다", "나의 상처도 나의 일부다. 아름다운 일부다"라고 적으면서, 최근 내가 드러낸 불완전함들을 떠올렸다. 오늘 글쓰기 모임에서 초보라고 고백한 것, 어제 후배에게 모른다고 솔직히 말한 것, 지난주 아내에게 불안하다고 털어놓은 것, 지난달 아들에게 아빠도 실수한다고 인정한 것. 이런 것들을 드러낸 후에 얻은 것은 진짜 대화, 깊은 연결, 실질적 도움, 그리고 마음의 평화였다.
하지만 아직도 더 드러내고 싶지만 망설여지는 것들이 있다.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가끔 느끼는 깊은 외로움, 완벽하지 못한 아빠이자 남편으로서의 부족함. 이런 것들도 언젠가는 드러낼 수 있을까?
☕️ 40대 후반, 가면 벗기
젊을 때는 약함을 보이는 게 조금은 용납됐다. 20대에는 "아직 배우는 중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었고, 30대에는 "경험이 부족해서요"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완벽함이 더 강요된다. 40대가 되면 "이 나이면 다 알아야 하는데..."라는 무언의 압박이 있고, 47세가 된 지금은 "약점을 보이면 무시당할 텐데..."라는 두려움이 있다. 나이가 완벽함을 강요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이가 들수록 불완전함을 드러내기가 더 쉬워진다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왜일까? 잃을 게 적어지기 때문이다. 20대에는 "실패하면 미래가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47세인 지금은 "실패해도 이미 살아온 인생이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자존감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됐다. 20대에는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가 중요했지만, 47세인 지금은 "나는 나를 안다"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진짜 연결의 가치를 안다. 20대에는 "많은 친구가 중요해"라고 생각했지만, 47세인 지금은 "진짜 한 명이 중요해"라는 것을 안다.
✨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법
저녁에 노트를 펼치고 앞으로 어떻게 불완전함을 더 잘 드러낼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첫 번째로 생각한 것은 "나도 그래요"라는 애매한 말 대신 "나 이래요"라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저 요즘 힘들어요"라고 말할 때, 예전의 나는 "나도 그래요"라고 애매하게 공감하는 척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요. 지난주에 공황발작이 왔어요"라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됐다. 구체적인 취약성이 진짜 연결을 만든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생각한 것은 하루 종일 완벽한 척 하는 순간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다 알아요"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모르는 순간, "문제없어요"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힘든 순간,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불안한 순간, "괜찮아요"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안 괜찮은 순간들. 이런 순간들을 체크리스트처럼 찾아내서 하나씩 진실로 바꿔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는 불완전함 공유 실험이다. 일주일간 매일 한 사람에게 불완전함 하나씩을 공유하는 것이다. 월요일에는 동료에게 "이거 모르겠어요", 화요일에는 친구에게 "요즘 외로워요", 수요일에는 가족에게 "불안해요", 목요일에는 후배에게 "실수했어요", 금요일에는 온라인에 "서툴지만 시작했어요"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반응을 관찰하는 것. 아마 대부분의 경우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네 번째는 킨츠쿠로이 연습이다. 나의 금 간 곳을 찾아보는 것이다. 신체적으로는 살, 주름, 흰머리가 있고, 정신적으로는 공황장애, 우울, 불안이 있고, 경력적으로는 실패, 좌절, 탈락의 경험들이 있고, 관계적으로는 이혼까진 아니지만 단절과 갈등의 순간들이 있었다. 이 각각을 금으로 재해석하는 연습을 해봤다. 살은 "살아온 시간의 증거"가 되고, 주름은 "웃고 울었던 지도"가 되고, 공황장애는 "더 깊이 이해하는 능력"이 되고, 실패는 "성장의 증거"가 된다.
다섯 번째로는 브레네 브라운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봤다. "완벽한 나를 포기하면, 진짜 나를 얻는다"는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자문했다. 완벽한 척 하느라 숨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드러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최악의 시나리오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대부분 괜찮은 일들이었다. 그럼 최선의 시나리오는? 진짜 연결이었다. 답은 명확했다.
🌾 불완전함의 역설
밤이 깊어가면서 이상한 역설을 떠올렸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가 한 말이다. "이상한 역설이 있다.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나는 변할 수 있다." 완벽주의의 함정은 "완벽해지면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영원히 완벽해지지 않아서 영원히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불완전함의 자유는 "나는 불완전해. 괜찮아"라고 인정하면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고 느끼고, 지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경험을 돌이켜보면 완벽주의자였던 시절에는 성공했지만 공허했고, 칭찬받았지만 외로웠고, 완벽해 보였지만 불안했다. 하지만 불완전함을 수용한 지금은 서툴지만 행복하고, 비판받지만 자유롭고, 불완전해 보이지만 평화롭다. 어느 쪽이 더 완전한 삶인가? 답은 분명했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인 지금이 훨씬 더 완전한 삶이었다.
🎯 이번 주 실천
노트앱에 이번 주 실천할 것들을 적었다. 매일 불완전함을 하나씩 드러내기로 했다. 월요일에는 모르는 것 하나를 인정하고, 화요일에는 실수 하나를 공유하고, 수요일에는 도움을 요청하고, 목요일에는 약점을 고백하고, 금요일에는 불안을 표현하고, 주말에는 진짜 나를 보여주기로 했다. 그리고 매일 밤 불완전함 일기를 쓰기로 했다. 오늘 드러낸 불완전함이 무엇인지, 상대의 반응은 어땠는지, 내 기분은 어땠는지, 무엇을 배웠는지를 기록하는 것이다.
🌟 오늘의 약속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짐을 적었다. 오늘부터 나는 완벽한 척하지 않는다. 불완전한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금이 간 곳으로 빛이 들어온다는 것을 믿는다. 브레네 브라운처럼 취약성이 진짜 용기라는 것을 기억한다. 레너드 코헨처럼 모든 것에는 금이 가 있고, 그래서 빛이 들어온다는 것을 노래한다. 킨츠쿠로이처럼 상처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 기회로 삼는다.
달의 모습이 떠올랐다. 달도 완벽한 원이 아니라 이지러지고 차고를 반복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도 그렇게 살면 된다. 완벽의 가면을 벗고, 강함의 연기를 멈추고, 괜찮은 척을 그만두면 된다.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용기, 그것이 진짜 연결의 시작이라는 것을 오늘 북카페에서 직접 경험했다.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를 돌이켜봤다. 점심에 글쓰기 모임에서 "저는 최근에 처음 글을 제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47살인데, 이제 시작했어요. 매일 5분씩 씁니다. 서툴고, 부족하지만요"라고 말한 그 순간이 떠올랐다. 말을 하고 나서 잠깐 후회했지만,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잘한 선택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가면을 벗었고, 우리는 진짜 대화를 나눴고, 진짜 연결이 생겼다.
내일도 나는 진짜 나를 보여줄 것이다. 금이 가고, 상처 나고, 불완전한 나를. 왜냐하면 그것이 진짜 나니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킨츠쿠로이처럼, 내 상처는 금으로 수선될 것이고, 그 금은 빛을 받아 더욱 빛날 것이다.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용기. 이것이 내가 배워가고 써가고 있는 100가지 용기 중 16번째다. 아직 멀었지만, 하나씩 배워가고 있다. 그리고 이 용기는 특별히 중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용기의 기초가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나를 인정할 수 있어야, 두려워도 시작할 수 있고, 확신 없어도 계속할 수 있고, 서툴러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내일은 수요일. 17번째 용기를 쓸 것이다. 오늘처럼 진솔하게, 오늘처럼 불완전하게.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