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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 배움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_인생 희노애락

by SSODANIST 2025.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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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장을 보며, 나를 본다

거울 앞에 선 중년

리모컨을 든 채 멈춰 섰다. 화면이 꺼진 TV 속 검은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다. 웃고 있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 평소 TV를 거의 보지 않는 내가, 주변의 입소문을 듣고 넷플릭스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를 틀었다. 그리고 두 편을 보고 난 지금, 나는 알 수 없는 먹먹함에 사로잡혀 있다.

화면 속 김낙수 부장. 지친 어깨, 조심스러운 말투, 그리고 가끔씩 스쳐가는 쓸쓸한 미소. 출근길 지하철 유리창에 비치던 내 모습이 자꾸만 겹쳐진다. 어쩌면 이렇게 닮았을까. 아니, 닮은 게 아니다. 그는 나고, 나는 그다.

스물여섯, 그 설렘의 시절

"청춘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다." - 사무엘 울먼

 

스물살 후반, 처음 명함을 받아 들었을 때의 그 떨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OO그룹 사원'이라고 인쇄된 작은 종이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가끔씩 꺼내 보곤 했다. 그때의 나는 확신에 차 있었다. 4년 안에 대리, 10년 안에 부장. 그리고 40이전에는 임원. 명확한 로드맵과 함께, 세상 모든 것이 가능할 것만 같았다.

그로부터 스무 해.

지금의 나는 임원 직함을 달고 있지만, 신입사원들에게 "요즘 젊은 애들은"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려 할 때마다 입을 다문다. 꼰대 소리 들을까봐. 동시에 상위 관리자들 앞에서는 실적 숫자 하나가 내 팀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으니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제2의 미생, 그러나 더 깊은 절망

'제2의 미생'이라는 평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생이 신입사원 장그래의 고군분투를 그렸다면, 김부장은 그 장그래가 이십 년을 버텨온 후의 이야기다. 어쩌면 미생보다 더 잔인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신입사원의 고생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중년의 고단함은 그저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압축되니까.

드라마 속 면담 장면. 김낙수가 줄타기하듯 말을 고르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질문을 받을 때, 그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는 게 보였다. 사장의 눈치, 상무의 기분, 팀원들의 사기 모든 것을 저울질하며 눈동자가 흔들리는 그 순간들이 너무 내 모습 같아서 짠했다.

샌드위치의 무게

"중년은 청춘의 노년이요, 노년의 청춘이다." - 빅토르 위고

 

샌드위치 세대. 참 적절한 표현이다. 위로는 실적 압박에 시달리고, 아래로는 후배들 챙기랴, 집에서는 대입을 앞둔 자식 걱정에 노후 준비는커녕 부모님 병원비에 전전긍긍한다. 한 달 월급이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드라마에서 김낙수가 고군분투할때 그의 아내 또한 언제일지 모르는 정리해고를 고민하는 장면은 마치 우리의 혈신 삶과 더무 닮아 있었어 마치 내 독백 같았다. 서울에 집 한 칸 마련하고, 대기업에서 부장까지 달았으니 누가 봐도 성공한 삶이다. 명문대 나온 동기들보다 빨리 승진했고, 부모님께 효도도 했고, 아이들 사교육도 뒤처지지 않게 시켰다.

그런데 왜일까. 왜 이렇게 마음 한구석이 시린 걸까.

성공의 무게, 포기의 무게

특히 김낙수가 늦은 밤 혼자 소주를 기울이며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같이 잔을 들어 올리고 싶었다.  자신감 넘치던 신입사원은 어디 갔고, 이제는 부서 실적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찬 중년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패배한 것은 아니다. 아니, 패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찰리 채플린

 

우리는 그저 현실과 타협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뿐이다. 20대 때 꿈꾸던 여행작의 꿈은 서랍 깊숙이 넣어뒀고, 30대 때 시작하려던 창업은 가족이라는 책임감 앞에 접었다. 40대인 지금, 주말 골프도 낮술도 모두 대한민국 가장에게는 사치가 되었다.

포기한 것들의 목록이 이루어낸 것들의 목록보다 더 길다. 그것이 바로 성공의 무게다.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포기한 것들, 미뤄둔 꿈들, 삼킨 말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짠하다.

보이지 않는 연대

같은 시간, 어딘가의 거실에서. 아마도 나와 비슷한 나이의, 비슷한 직급의, 비슨한 고민을 안고 사는 누군가도 이 드라마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하지만 김낙수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나만 이렇게 사는 게 아니구나.'
'우리 모두 조금씩 무너지면서도, 조금씩 버티고 있구나.'

이것이 바로 드라마가 주는 위로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고, 나의 외로움이 우리의 연대가 되는 순간.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한 주를 더 버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요일은 온다

이제 두 편만 공개되었으니 앞으로의 전개가 어떨지는 모른다. 김낙수가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낼지, 아니면 계속 이 고단한 일상을 이어갈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현실은 드라마처럼 극적이지 않다는 것을. 대부분의 중년들에게 반전은 없다. 다만 버팀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계속 보려고 한다.

김부장을 보는 것은 나를 보는 일이고, 나를 보는 것은 나를 위로하는 일이니까. 우리는 이번 주도 무사히 버텨낼 것이다. 월요일 아침, 다림질한 셔츠를 입고 출근길에 오르며, 지하철 손잡이를 붙잡고, 사무실 형광등 아래 앉아, 또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주말 밤이 되면, 넷플릭스를 켜고 김부장의 하루를 들여다보며, 또 한 번 웃고 울고 한숨 쉬며, 다음 주 월요일을 준비할 것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모험이다." - 박완서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우리의 평범하고도 특별한 이야기. 찬란하지는 않지만 치열했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진실했던 우리의 이십 년.

그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니까.


P.S. 드라마를 보고 난 후, 오랜만에 서랍 깊숙이 넣어뒀던 오래전 기록들을 꺼내봤다. "40대가 되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스물 후반의 나의 필체가 낯설었다. 그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넌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오늘의 나에게도 그리도 당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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