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언 & 생각

30년 충성 고객이 현대카드를 손절하는 진짜 이유

by SSODANIST 2025. 11. 29.
728x90
반응형


디자인 왕국의 몰락, 그리고 예견된 이별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였던가.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더니,
내 20년 순애보가 이렇게 막을 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첫사랑, 그 강렬했던 M의 추억

이야기는 바야흐로 내가 갓 성인이 되었던 19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길바닥에 좌판을 깔고 대학생들에게 카드를 발급해주던 그 야생의 시절, 나는 현대카드라는 세련된 연인을 만났다.

 

남들은 경품 따라 철새처럼 카드를 바꿀 때도 나는 지조 있는 선비마냥 현대카드만 고집했다. 투박한 M카드로 시작해 강렬한 붉은 빛의 '레드(Red)'를 지나, 마침내 나름 보랏빛 귀족 '퍼플(Purple)'에 안착하기까지. 나의 경제 활동은 곧 현대카드의 역사였다. 연 5~6천만 원을 긁어대며 연체 한 번 없었던 나는, 자칭타칭 '충성스러운 디자인 왕국'의 고객이었다. 아니 호구였나?

 

프리비아 여행 서비스, 전용 상담 데스크, 호텔 바우처... 퍼플이 주는 달콤한 특권들은 마치 "넌 특별해"라고 속삭이는 연인의 밀어와도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영원할 줄 알았다.

권태기, 혹은 배짱 장사

균열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뜬금없는 '에디션' 놀이가 시작되더니, 급기야 내가 쓰던 카드의 유효기간 연장이 불가하다는 통보가 날아왔다. "새 버전이 나왔어. 연회비는 20만 원 올라서 100만 원이야. 근데 혜택은 좀 줄였어. 싫으면 말고." 이런 느낌 이었다.

 

마치 오래 사귄 연인이 "나랑 계속 만나고 싶으면 명품 가방 하나 더 사와. 대신 데이트는 김밥천국에서 할 거야"라고 선언하는 꼴이었다. 이게 배짱인지 자신감인지, 아니면 '갈아탈 테면 갈아타 보라'는 가스라이팅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기가 찼다. 하지만 어쩌랴. 미운 정 고운 정이 무섭다고, 나는 30년 가까운 의리를 지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몇단계 낮은 등급의 실용성있는 카드를 신청했다. "그래,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하는 미련 때문이었다.

 

잠수 이별, 그리고 AI와의 사투

문제는 여기서부터 터졌다. 카드를 신청하고 5일이 지났다. 보통의 연인이라면 "잘 지내?" 문자라도 보낼 텐데, 이 회사는 감감무소식이다. 배송 알림은커녕 접수 문자조차 없다. 답답한 마음에 앱을 켜니, 내 카드 발급 내역엔 작년에 받은 카드가 최신이란다. 도르마무도 아니고, 시간을 1년 전으로 되돌려 놓은 건가?

 

결국 나는 지옥의 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보이는 ARS'가 편하다기에 눌렀더니 URL은 연결조차 안 된다. "디자인 철학이 확고하다더니, 보이지 않는 ARS를 '보이는 ARS'라고 우기는 현대미술적 은유인가?"

 

겨우 연결된 AI 챗봇은 동문서답의 향연이다. 내가 묻는 말엔 대답 없고 자기 할 말만 짓겨대는 꼴이, 마치 벽 보고 대화하는 기분이다. 채팅 상담원은 묵묵부답, 모르쇠로 일관한다.

 

무너지는 왕국

우여곡절 끝에 상담원과 통화가 되었다. "고객님, 5일이 지났는데... 저도 상태를 모르겠네요.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또 연락 두절되었던 체팅 상담원으로부터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야 틱 하고 날아온 문자는 가관이었다. [정상신청이 안됐다. 다시 신청해라. 순서는.....] 아...그래서 이유가 뭐냐고??

 

사과도, 설명도 없이 그저 '다시 해라'는 통보.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깨달음이 있었다. 스타벅스와 배달의민족이 왜 PLCC(상업자 표시 신용카드) 파트너를 다른 회사로 갈아치웠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앱은 화려한 껍데기 속에 버그를 숨기고 있고, 고객 응대 시스템은 구석기 시대로 퇴보했다.

 

"기본(基本)이 없는 화려함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다." 돈을 쳐발라 세운 디자인 왕국이 내부에서부터 썩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겉치장에만 목숨 걸고, 정작 가장 중요한 '고객과의 소통'이라는 기둥을 뽑아버린 결과다. 소비자는 화려한 플레이트 디자인이 아니라, 물 흐르듯 연결되는 서비스와 신뢰를 원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그들은 망각했다.

이별을 고하며

마지막 통화에서 상담원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느껴진 일말의 인간미 때문에 욕설은 참았다. 그 상담원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시스템을 이따위로 만든 경영진의 탓이지. 하지만 이제는 정말 놓아줄 때가 되었다. 나는 당분간 카드 없이 지내는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까맣고 무겁고 느려 터진 앱을 내 폰에서 지우려 한다.

 

영원한 기업은 없다. 로마 제국도 망했고, 몽골 제국도 사라졌다. 하물며 기본을 무시하고 겉멋에 취한 카드사가 영원할 리 있겠는가. 나의 이별은 나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주위 친구 10명 정도는 설득해 함께 탈출할 계획이다. 이것이 20년 짝사랑에 배신당한 고객의 마지막 소심한 복수이자, 그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다.

 

"있을 때 잘해, 그러니까 잘해." 오래된 유행가 가사가 뼈에 사무치는 밤이다. 결국, 우리는 헤어지는 순간을 맞이했다. 안녕, 나의 현대카드.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