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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 & 생각

마지막 수업_이어령

by SSODANIST 2026.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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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예스24

우리는 초대받은 손님입니다

— 이어령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오늘 아침, 눈을 뜨는 순간 어떤 마음이 먼저 찾아왔는가?

'아, 또 하루가 시작됐구나'라는 무거운 한숨이었을까, 아니면 '오늘은 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라는 작은 설렘이었을까? 나는 솔직히 대부분의 아침 전자였다. 거울 속에 비친 어제보다 조금 더 지쳐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며, 오늘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머릿속으로 나열하곤 했다.

그런데 운동하며 우연히 듣게된 유튜브속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인생을 '숙제'처럼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암세포가 온몸을 잠식해 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선생님은 "내 인생은 파견 근무나 숙제가 아니라, 선물 받은 축제였다." 말하셨다고 한다.

축제라니. 나는 그 단어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섰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산다. 돈을 벌어야 하고, 집을 사야 하고, 회사에서 인정받아야 하고,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 마치 누군가가 정해놓은 정답지를 쫓아 끊임없이 달리는 학생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물으셨다. 만약 이 모든 게 숙제가 아니라 축제였다면 어떨까?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가 고통스럽게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아름다운 별을 마음껏 즐기고 춤추다 가기 위해서였다면?

 

"인생은 미션(Mission)이 아니라 기프트(Gift)다."

우리는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이 땅에 파견된 군인이 아니다. 우리는 우주로부터 초대받은 아주 특별한 손님이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을 때, 우리의 임무는 무엇일까? 차리고 치우는 것이 임무인가? 아니다.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고, 음악에 맞춰 기분 좋게 흥얼거리고, 친구와 즐겁게 대화하는 것. 그 누림 자체가 손님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주방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려고 한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야 해'라며 스스로를 혹사시틴다. 나 역시 그랬습니다. 매일 '오분 쓰고, 오분 달리기'를 하면서도, 그것조차 '해내야 할 것'으로 만들어버린 적이 있다. 그 순간의 고요함을 즐기는 대신, 체크리스트의 한 칸을 채우는 데 급급했던 했다.

 

선생님은 '두잉(Doing)'과 '비잉(Being)'의 차이를 말씀하셨다. 젊은 날, 선생님은 철저한 두잉의 인간이었다. 글을 쓰고, 비평을 하고, 정책을 만들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했다. 세상은 그가 한 일을 보고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죽음이 가까워오자, 그 모든 '두잉'들이 안개처럼 희미해지고, 오직 '비잉' — 있음 그 자체가 바위처럼 선명하게 드러나더라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서 가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여기 숨 쉬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기적이다."

나는 이 문장을 들으며 멈칫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두잉'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나 연봉 얼마야', '저 프로젝트 내가 성공시켰어', '나 이런 차 타'. 하지만 만약 사고를 당해 병상에 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가치 없는 사람이 되는 걸까?

아니다. 숨을 쉬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온기를 느끼는 그 순간, 우리는 우주 전체와 맞먹는 무게를 지닌 존재이다.

 

선생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늙지 않았다"고 하셨다. 육체는 쇠약해져 링거줄에 의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다섯 살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으로 반짝였다."나는 평생 우물을 파는 아이였다. 목이 말라서 판 게 아니라, 이 땅속에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해서 팠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질문을 멈춘다. '원래 그런 거야', '세상 다 그렇지 뭐'라며 스스로 늙어버린다. 하지만 권태는 육체의 노화보다 훨씬 더 무서운 내면의 주름이다.

호기심은 마치 늙지 않는 방부제와 같다. 어제 본 배우자를 오늘 처음 본 사람처럼 궁금해하고, 매일 다니는 출근길 가로수의 잎사귀가 어제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관찰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80세가 되어도 청춘입니다. 하지만 20살이라도 '아, 세상 뻔해. 재미없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장례를 치른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선생님은 죽음을 삶의 반대말, 즉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가장자리'라고 표현하셨다. 컵에 가장자리가 있어야 물을 담을 수 있듯이, 죽음이라는 한계선이 있기에 삶은 비로소 형태를 갖춘다는 것이다.

"우리가 별을 볼 수 있는 건 밤이 어둡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어둠이 배경이 되어주기에, 생명이라는 별이 그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오늘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포옹이 그토록 간절하고 소중할까?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마지막'이라는 인식이 모든 순간을 보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용  중 가장 뼈아픈 조언이 있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 마라." 우리는 태어날 때는 오리지널로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대부분 복사본으로 죽는다. 남들이 좋다는 대학, 남들이 좋다는 직장, 남들이 부러워하는 아파트를 쫓다가, 정작 '나'라는 고유한 우주는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을 듣고 또 들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내가 쫓고 있는 것은 정말 나의 욕망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이게 좋은 거야'라고 말해줘서 좋다고 믿게 된 것인가?

"1등이 되려고 하지 말고, 유일한 존재가 되어라. 1등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추월당할 수 있지만, 유일한 존재는 비교할 대상이 없기에 영원히 빛난다." 정말 멋진 말이다.

 

마지막 수업이 끝날 무렵, 창밖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의 목소리만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그는 제자의 손을 잡으며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슬퍼하지 마라. 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글로, 내 말로, 그리고 너의 기억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나는 내 육체로 쓴 모든 것을 다 소진하고 간다. 너도 그러하여라. 남김없이 태우고, 남김없이 사랑하고, 남김없이 살아라."

 

칼 세이건은 말했다. "우리는 모두 별의 먼지로 만들어졌다." 실제로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 하나하나는 수십억 년 전 폭발한 별의 잔해이다. 그러니 우리는 작지 않다. 우리 안에는 우주의 역사가, 별의 폭발이, 그 찬란한 빛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

지금 손에 쥔 차잔의 따스함,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퇴근길 지하철의 덜컹거림. 이 모든 것이 사실 기적이다.

 

이제 수업은 끝났다. 문을 열고 나가도 좋다. 그리고 저 밖의 세상, 그 시끄러운 소음 속으로, 그 치열한 삶의 현장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라.

다만, 더 이상 정답을 찾아 헤매지 마라. 각자가 걷는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정답이다. 여러분이 내쉬는 그 숨결 하나하나가 보석이다.

눈부시게 살아라. 단 한 순간도 너 자신을 의심하지 마라. 너는 이미 완벽한 봄이다.

 

2026년 2월

하와이 대저택의 유튜브  중 "인생은 숙제가 아닌 ‘축제’인데 왜 당신은 즐기지 못하나요?"를 듣고 느끼고 필사하는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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